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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가수의 꿈 이루기까지 수많은 실패 맛봤죠"

쥴라이신부 2009. 7. 6. 01:36

[톱클래스] "가수의 꿈 이루기까지 수많은 실패 맛봤죠"

노래방 애창곡 1순위 '무조건'의 가수

 

박상철


<이 기사는 톱클래스 7월호에 게재

 

되었습니다.>

“무조건 달려갈 거야~짜짜라 짜라짜 빠빠빠.” 2005년 발표 당시부터 폭발적인 반응을 얻으며 노래방과 휴대전화 벨소리를 점령한 노래 ‘무조건’. 4년이 지난 지금도 노래방 애창곡 1순위로,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노래방에 가면 부르고 나와야 섭섭하지 않은 국민가요로 뿌리내리고 있다.

이 노래를 부른 가수 박상철은 요즘 하루 평균 6~8개의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다.

방송뿐 아니라 전국의 지역축제, 대학축제, 고등학교 축제까지, 와 달라는 섭외가 쇄도하기 때문이다.

“‘무조건’의 인기가 식지 않는 것이 행운이긴 하지만, 고민스럽기도 해요. 녹화하면서 신곡을 포함해 두세 곡을 불러도 방송에 나가는 것은 ‘무조건’ 뿐이고, 축제에 가도 ‘무조건’은 무조건 불러야 한다고 관객들이 은근히 압력을 넣습니다. 제 노래 ‘황진이’도 좋아하는 분이 많지만 ‘황진이 다음엔 무조건을 불러야 한다’며 무대 앞에 앉아 계신 분들이 다른 노래를 부를때면 은근히 압력을 넣는 듯한 눈빛을 보냅니다.”

구성지고 간드러진 여느 트로트와 달리 박상철표 트로트는 강렬한 비트와 로커가 내지르는 듯한 창법으로, 듣는 이로 하여금 몸이 먼저 반응하게 한다. 노래처럼 신나기만 할 것 같은 박상철. 그는 지금의 웃음을 얻기까지 기나긴 터널을 거쳐야 했다.

  “이래 뵈도 삼척의 노래 신동이었어요.(웃음) 학교건 마을이건 노래대회에 나가면 상을 휩쓸었죠. 막연했지만 ‘가수하면 잘할 수 있을 거야’라고 생각했죠.”

그가 음악의 참맛을 알게 된 건 고등학교 때다. “다 말씀 드리긴 어렵지만…”이라며 망설이던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가정 형편이 정말 최악이었죠. 학창시절 내내 제 삶 자체가 싫었어요. 늘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죠. 그러던 차에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던 악기도 가질 수있고, 음악도 할 수 있는 브라스밴드가 눈에 들어왔어요. 트럼펫을 불며 음악이론도 배웠죠.”

하지만 그는 허전했다. 노래를 부르고 싶었다.

“당시 록밴드가 유행했는데 저도 친구 몇 명과 록밴드를 만들었어요. 여기서 싱어를 하며 ‘노래로 승부를 봐야겠다’는 맘을 굳혔던 것 같아요.”

학력고사를 본 다음 날 그는 가수의 꿈을 품고 고향을 떠나 서울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서울에 오자마자 작곡가 사무실로 직행했어요. 작곡가가 대뜸 ‘음반 취입비로 1000만 원을 내라’고 하더군요. 테스트도 하지 않고 돈 얘기부터 꺼내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그에게 희망을 걸 수 밖에 없었지요.”

누빈 지 1년 만에 작곡가가 요구한 돈을 모은 그는 통장에 찍힌 잔고를 보며 가슴이 벅찼다고 한다.

“돈을 꼭 쥐고 정신없이 작곡가에게 달려갔어요. 그런데 돈을 받고 나더니 안면을 바꾸더군요.”

작곡가에게 사기를 당한 후 그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의 삶은 밑바닥으로 향했다. 여기저기를 떠돌며 노숙했다. 사기당한 것보다 음악을 할 수 없다는 게 더 괴로웠던 시절이다.

“노숙하면서 ‘나는 음악을 할 수 없는 사람일까’ 고민했어요. ‘정말 그렇다면 어릴 때부터 가수만을 꿈꿨던 나는 바보일까?’ 하고요. 꿈을 잃은 상실감이 정말 컸어요.”

답답했다. 그래서 점쟁이까지 찾아갔다. 하지만 그럴수록 답답함은 더해 갔다.

“점쟁이들이 ‘그 관상에 잘되길 바라면 도둑놈이지’ 하더군요. 하긴 그땐 제가 생각해도 최악이었어요.”

삼척의 남자 미용사로 이름 날리기도

명동 거리를 헤매던 그는 여자들로 빽빽한 미용실 앞에서 문득 ‘그래, 이걸 하면 재기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닥치는 대로 일하며 미용기술을 배웠다.

“당시만 해도 남자 미용사가 드물었죠. 남자인 제가 여자의 영역인 미용기술을 배우면 유명해지고 돈도 많이 벌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의 생각은 적중했다. 미용사 자격증을 딴 후 삼척으로 내려가 미용실을 차리고, 그의 인생 최초로 대박도 맛봤다.

“남자 미용사가 신기했는지 삼척뿐 아니라 강릉, 속초, 동해에서까지 아주머니들이 몰려들었죠. 단숨에 미용실이 들어서 있던 건물까지 사 버릴 만큼 돈을 모았습니다.”

그의 성공에는 노래가 한몫했다.“미용실에 노래방 기계를 들여놨어요. 노래방 기계 반주에 맞춰 손님들에게 노래를 불러 줬더니 반응이 좋았어요.
덕분에 ‘노래하는 미용사’란 별명을 얻었죠. 마침 삼척을 찾은 <전국노래자랑>에 나가 1등을 하며 삼척과 동해, 강릉, 속초 등지에선 유명가수 못지않은 인기인이 됐답니다(웃음).”

그 무렵 그는 잊었던 노래가 다시 그리워졌다. 1992년부터 삼척과 서울을 오가며 한 작곡가로부터 노래 훈련을 받는다. 그렇게 9년, 2000년에 ‘부메랑’이란 노래로 드디어 가수의 꿈을 이뤘다.

“9년이 걸리더군요. 한번 실패해 봤기에 정말 조심스러웠습니다. 음반 준비부터 제작, 홍보까지 모두 제 손으로 했어요. 그러고 보니 제가 트로트 계 1호 인디 가수가 아닐까 싶네요(웃음).”

1집은 실패했지만, 실패에 대처하는 맷집이 생긴 다음이어서인지 그는 금방 다시 일어섰다.

“운이란 건 엉뚱한 곳에서 터지나 봐요”란 말로 그가 입을 연다.

“2001년 말에 오승근 씨가 ‘있을 때 잘해’라는 노래를 발표해요. 이때 오승근 씨 부인 김자옥 씨가 남편 노래를 홍보하겠다고 공주 콘셉트로 TV쇼에 나오기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오승근이 아닌 김자옥의 인기가 올라갔어요. 인터넷에‘김자옥, 자옥이, 자옥아’가 검색 순위 1위였죠. 덩달아 TV와 공연에서 김자옥 씨와 저를 함께 불렀어요. 그러곤 ‘자옥아’를 꼭 함께 부르게 했죠. 본의는 아니었겠지만 김자옥 씨가 전국을 돌며 제 홍보를 해 준 거죠. 덕분에 아직도 제가 김자옥씨 남편인 줄 아는 분들이 계세요.”

다시 4년 후, 대한민국 국민 누구나 따라 부르는 박상철표 국민가요 ‘무조건’이 탄생한다.

“답답한 세상에 ‘무조건’ 만큼 가슴 뻥 뚫리는 노래를 찾기 쉽지 않았을 거예요. 힙합처럼 어렵지도, 록처럼 과격하지도 기존 트로트처럼 가볍지도 않지만 몸이 먼저 반응하는 노래죠. 그냥 신나는, 그래서 ‘무조건’을 부르는 것 아닐까요?”

‘무조건’은 음악가 박상철의 감각이 만들어낸 노래다.

“2005년 여름 10대 대상의 TV 음악방송에서 처음 ‘무조건’을 불렀는데 그때 ‘무조건’은 지금과 달랐어요. 성인 타깃의 노래였거든요. 정신없이 노래하는데 무대 앞 객석에 앉아 있던 교복 입은 학생들이 ‘무조건, 무조건, 짠짜라 짜라짜라 빠빠빠’라고 추임새를 넣으며 방방 뜨는 거예요. ‘아! 이거다’란 느낌이 왔죠. 집에 오자마자 편곡했어요. 제가 록밴드 로커 출신이잖아요. 비트도 강하게 하고, 기교도 다 뺐어요.

마치 펑크 음악처럼 바꿨어요. 지금 듣고 있는 ‘무조건’은 그렇게 탄생한 노래예요.”박상철은 “어려웠던 시절을 한꺼번에 보상받는 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을 비주류로 생각한다. 그는 2009년을 사는 힘들고 지친 자칭 타칭 수많은 비주류에게 할 말이 있단다.

“제가 뭐 볼 게 있습니까. 남들처럼 좋은 집안에 좋은 학교를 나온 것도, 다른 연예인처럼 훤칠한 키에 꽃미남도 아니잖아요. 음대 출신도 아니고요. 강원도 사투리에 어눌한 말투죠. 하지만 끈질기게 노력하는 진심은 결국 사람들에게 전해진다고 믿습니다.”

그는 그의 인생을 웃게 해 준 음악에 감사한다고 했다. 그래서 죽을 때까지 노래를 놓지 않겠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