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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마이클 잭슨 1958~2009] "통일되면 다시 보자

쥴라이신부 2009. 6. 28. 01:31

[마이클 잭슨 1958~2009] 10년전 6월 25일 잠실공연서
              "통일되면 다시 보자"
첫 공연때 측근경호팀장을 맡은 이지완씨.

4번이나 방한(訪韓)… 한국과 인연 깊어


첫 공연 때 측근 경호팀장 "햄버거 달라던

모습 선해"

"갑자기 아이처럼 햄버거 먹고 싶다고 하던 기억이 선한데…."

인천에서 사설경호업체를 운영하고 있는 이지완(43)씨는 26일 아침 마이클 잭슨의 사망 소식을 듣고 순간 멍했다. 이씨는 1996년 10월 마이클 잭슨이 첫 내한공연을 가졌을 때 측근경호팀장을 맡았던 인물. 지난 5월엔 지하철 1호선 부평역에서 선로에 떨어진 여대생 한모(19)양을 구해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다.

이씨는 13년 전 기억을 떠올리며 "곁에서 본 마이클 잭슨은 대인(大人)의 면모까지 갖췄더라"며 '그날'의 사건을 들려줬다. 공연장에서 호텔로 돌아가던 길, 갑자기 잭슨이 햄버거가 먹고 싶다고 해서 종로의 한 햄버거집에 들어섰을 때였다. 한 극성 여성팬이 기습 포옹을 하려다 마이클 잭슨의 뺨을 심하게 할퀴었다. 이씨는 "잭슨이 화장을 너무 두껍게 해 얼굴에 손톱자국이 움푹 팼다"며 "그가 전혀 화를 내지 않는 모습을 보며 스타이기 전에 대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이 대표는 "그는 내내 조용하다가도 무대 위에 올라가는 순간 폭발적으로 돌변했다"며 마이클 잭슨을 회상했다.

마이클 잭슨은 한국과 긴밀한 관계를 맺은 거의 유일한 세계적 팝스타였다. 잭슨의 사망일(현지시각 6월 25일)로부터 딱 10년 전인 1999년 6월 25일, 그는 서울 잠실 올림픽주경기장에서 자선공연 '마이클 잭슨과 친구들'을 펼쳤다. 4만여 관중이 운집한 가운데 머라이어 캐리, 보이즈투멘 등 미국 스타와 국내 가수 H.O.T와 S.E.S 등이 참여했다. 마이클 잭슨은 공연 전 한국의 통일을 염원하며 "통일되는 날 다시 만날 것"을 약속했다.

잭슨은 1996년 첫 내한 공연 이래, 97년 11월 무주리조트 투자협의, 98년 2월 김대중 대통령 취임 축하, 99년 잠실 공연 등을 위해 4번이나 방한했다.

97년에는 무주리조트 내 티롤 호텔 501호의 침대 옆 협탁에 볼펜으로 낙서를 남기기도 했다. 직접 그린 자신의 옆모습과 함께 'LOVE and SAVE OUR CHILDREN. KOREA IS GOD AND MUJU IS LOVE. LOVE always(우리 아이들을 아끼고, 보살펴주세요. 한국은 신이고, 무주는 사랑입니다. 영원한 사랑을 담아)'라는 메시지를 남겼다.

또 신라호텔 관계자는 "두 차례 방문 때 프레지덴셜 스위트룸 2229호에 머물던 잭슨이 갑자기 게임을 하고 싶다 해서 수행원들이 게임기를 사서 나르기도 했다"고 말했다.

당시 잭슨은 호텔에 채식 위주의 비빔밥을 준비해달라고 요청, '마이클 잭슨 비빔밥'으로 불리기도 했다.

 

 

 

["아버지 닮은 모습이 싫어서" 마이클 잭슨 성형의 비밀]

 

“자라면서 아버지를 닮아가는 내 모습이 싫었다. 내가 성형을 한 이유다.”

마이클 잭슨의 일대기를 그린 다큐멘터리 '히즈 스토리: 마이클 잭슨(His Story: Michael Jackson)'이 방영된다. 지난 2001년 미국에서 제작된 이 다큐멘터리는 26일 12시부터 28일까지 음악채널 MTV를 통해 방송된다.

이 프로그램은 마이클 잭슨이 5살 때 '잭슨 5'로 데뷔한 시절부터 '빌리 진(Billy Jean)', '비트 잇(Beat It)', '스릴러(Thriller)' 등의 전성기 시절과 이후의 성숙기를 다룬다. 불멸의 뮤직비디오들과 함께 숨겨진 이야기, 천재적인 음악적 재능 등이 소개된다.

잭슨은 성형 수술에 대해 "아버지를 점점 닮아가는 모습이 싫었기 때문”이라고 고백한다. 나아가 “너무 일찍 데뷔해서 내 유년 시절은 없었다”며 잃어버린 어린 시절을 아쉬워하는 인간적인 모습도 보여준다. 또 문워크로 상징되는 ‘빌리진’의 안무는 거리에서 만난 아이들 3명의 춤에서 배운 것이라는 비화도 털어놓는다.

 

 

 

["숨을 쉬지않아요" 잭슨 응급구호 전화 공개]

 

마이클 잭슨이 사망한 25일 그의 자택에 소방당국의 응급구호팀에 도착하기 전에 개인 의사가 잭슨에게 심폐소생술을 시도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 로스앤젤레스 소방국이 26일 공개한 911 응급구조 요청 전화내용에 따르면 익명의 남성 통화자가 잭슨이 사는 LA 홈비힐스 집으로 "가능한 한 빨리 구급차를 보내달라"며 긴급 구호를 요청했다.

이 남자는 "그가 숨을 쉬지 않는다. 우리가 그를 소생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911 전화 수신자에게 잭슨이 침대에 누워 있으며 '개인 의사'가 그를 소생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덧붙였다고 미국 언론이 전했다.

잭슨은 자택에 도착한 소방 응급구호팀이 UCLA 메디컬 센터로 긴급 후송한 후 사망한 것으로 발표됐다.

 

 

 

 

              [꿈의 동산에서 저주의 땅이 된 마이클 잭슨의 네버랜드]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의 돌연사와 맞물려 그가 남긴 꿈의 동산 ‘네버랜드(Neverland)’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마이클 잭슨은 자신의 재산 상당부분을 캘리포니아주 샌타바버러 소재 대저택인 ‘네버랜드’에 투자해왔었다. 동물원과 놀이시설을 조성한 어린이 공원이다. 이 명칭은 동화 피터팬에서 나오는 ‘이상의 섬’ 네버랜드에서 따왔다. 부지면적만도 2,800에이커(11 평방km)에 이른다.

그는 디즈니랜드처럼 어린이들의 세상 ‘네버랜드’를 꿈꿨다. 그래서 이상의 나라라는 의미에서 네버랜드로 명명했다. 그러나 결국 결코 실현될 수 없었던 ‘결코 아닌 땅’ 네버랜드가 돼버렸다. 1988년 문을 연 네버랜드는 얼마 안가 재정악화로 폐쇄하기에 이르게 된 것이다.

네버랜드에서 어린이 성추문 스캔들이 계속 터진데다 자산관리 능력 부족으로 재정이 크게 악화되자 밝혀지지 않은 가격에 2008년 시캐모어 밸리 랜치에게 매각조치했다. 그에게는 이상의 나라가 아닌 결코 보고 싶지 않은 땅이 돼버린 것이다.

■ '미국정보 포털' 유코피아(ukopia.com) 관련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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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경찰, 잭슨 진료 의사 승용차 압수]

 

미국 로스앤젤레스 경찰은 26일 ‘팝 황제’ 마이클 잭슨의 사망 원인을 가리기 위해 그를 진료했던 의사의 승용차를 압수했다고 밝혔다.

로스앤젤레스 경찰의 카렌 레이너 대변인은 마이클 잭슨 집에 있던 의사의 승용차내에 약물이나 잭슨의 사망과 관련한 다른 단서를 제공할만한 증거가 있는지 여부를 조사하기 위해 압수했다고 밝혔다.

레이너 대변인은 검시소의 조사관들이 이 의사와의 면담을 추진했다고 밝혔으나 이 의사가 잭산의 사망과 관련한 혐의로 수사를 받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레이너 대변인은 “의사의 승용차는 검시소 조사관들이 사인을 규명하는데 도움이 될만한 약품이나 다른 증거들이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압수된 것”이라고 배경을 설명했다.

 

 

 

[마이클 잭슨 1958~2009] 팝으로… 스캔들로…

 세계 대중문화 들썩인 '아이콘'

 

앨범 7억5000만장 판 '전설' 글로벌 기부붐

일으키기도

인생은 온갖 루머에 휩싸여

 

"80년대 그의 음악은 개방 시대를 처음 맞은 중국인들에게 서양 문화를 상징하는 주제곡이었다."(45세 중국인 사업가) 마이클 잭슨은 80~90년대를 살았던 세계인들에게 '팝 음악' '미국 문화' 자체였다. 하지만 '자연인'으로서 그의 인생은 끊임없는 루머에 휩싸인 불행의 터널이었다. '피부암' 논란도 그중 하나. 7월 영국 런던 O2 아레나 극장에서 예정됐던 그의 컴백 공연은 티켓 50여만장이 5시간 만에 매진되고 10만~15만원 티켓이 인터넷에서 1000만원 이상으로 거래되는 등 엄청난 관심을 모았다. 그러나 지난 5월 주최측이 "일부 공연을 내년 3월로 미루겠다"고 발표하면서 또다시 '와병설'을 낳았다. 그의 사망원인에 대해서도 마약성 진통제, 항우울제 과다복용설이 나오고 있다.

세상을 들끓게 한 팝스타

"팝 음악계에는 두 종류의 가수가 있는데 마이클 잭슨과 그 외의 가수들이다."(1982년 뉴욕타임스) 그의 음악인생은 시작부터 화려했다. 1958년 8월 29일 인디애나주 게리(Gary)의 철강 노동자 조 잭슨의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4명의 형들과 함께 그룹 '잭슨 5(파이브)'로 활동하며 히트곡 '아일 비 데어(I'll Be There)' 등을 남겼다.

잭슨은 당시를 "사람들이 주머니에 돈을 너무 많이 넣어줘 바지가 흘러내릴 지경"이었다고 회상했다. 전설적 흑인 음악 프로듀서 퀸시 존스를 만나면서 솔로 마이클 잭슨은 승승장구. 성인이 된 뒤 첫 앨범인 '오프 더 월'(1000여만장), 팝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앨범 '스릴러'(1억400만장)의 거대한 성공에 이어 '배드'(87년)와 '데인저러스'(91년) 등도 2000만장 이상 팔렸다. 펑크(funk)·소울(soul) 등 기존 흑인 음악적 요소에 팝 발라드, 록, 디스코, 테크노 등 온갖 장르를 뒤섞어 대중의 감성을 두루 사로잡았다. 그는 또 80년대 갓 탄생한 MTV를 적극 활용한 이미지 메이킹의 '달인'이기도 했다. 그의 노래, 우주에서 유영을 하는 듯한 춤 '문워크', 그리고 흑인 뮤지션들이 즐겨 입었던 반짝이 의상은 80년대 세계 대중문화의 상징이었다.

백인이 되고 싶었던 흑인?

마이클 잭슨은 그러나 80년대 후반부터 일부 흑인들의 지탄을 받는다. "백인을 꿈꾸는 흑인"이라는 요지였다. 실제로 매년 하얘지는 얼굴색, 작아지는 광대뼈, 높아지는 콧대, 얇아지는 입술은 백인의 모양새였다. 그러나 그가 백반증 환자였다는 주장도 있다. 햇빛에 극도로 예민한 그의 피부는 치료 과정에서 색소를 잃어갔다. 늘 긴 소매에 선글라스, 모자, 마스크를 착용했던 이유였다. 초창기 코 성형은 사고 때문이었지만 이후 그는 습관적으로 얼굴에 손을 댔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학대를 경험한 잭슨은 "아버지를 닮아가는 게 싫어 성형했다"고 말한 적도 있다. 최근에는 "수퍼박테리아에 감염됐다"는 뉴스도 나왔다.

'팝의 황제'마이클 잭슨이 밟아 온 영욕의 세월. 왼쪽부터‘잭슨5’시절의 앳된 모습, 93년 싱가포르 공연에서 히트곡‘데인저러스’를 열창하는 장면, 2002년 콘서트 출연 취소로 인한 재판에 참석해 흉측한 외모로 세인들을 놀라게 한 순간, 2005년 아동 성추행 혐의로 재판을 받은 뒤 걸어나가는 모습, 25 일 그의 갑작스러운 사망 소식을 전하는 각국의 신문들. /AP·로이터 연합뉴스

아동 성추행 사건 논란과 불운한 결혼생활

잭슨 인생의 가장 큰 그늘은 아동 성추행 논란이었다. 1993년 13세 소년 조단 챈들러를 성희롱했다는 혐의로 피소됐던 것. 당시 2200만달러의 합의금을 내고 사건은 정리됐지만 세상은 그를 '변태'로 규정했다. 2005년에도 그는 병원비가 없어 고생하던 아이를 도와줬지만 아이 엄마로부터 성추행범으로 몰렸다. 그녀가 상습 사기범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잭슨의 누명은 벗겨졌지만 그는 또다시 논란에 휩싸였다. 두 번의 결혼과 이혼으로 사생활이 원만하지 않았고, 백인인 아이 셋의 출생에 관한 논란도 뜨겁다. 모두 인공수정으로 태어났으며 마이클 잭슨이 생부가 아니라는 주장이 대세다.

최고의 기부 천사 연예인

스타가 글로벌 규모의 기부(寄附)·자선(慈善) 붐을 일으킨 건, 그가 거의 처음이었다. 1985년 '위 아 더 월드'의 수익을 아프리카 주민들에게 전달했으며, 1992년에는 '힐 더 월드 재단'을 설립해 전쟁과 기아에 시달리는 전 세계의 어린이를 도왔다.

1993년 당시 마이클 잭슨은 300여만명의 관객을 불러모은 67회 콘서트를 통해 얻은 수익을 모두 재단에 기부했다. 그는 자신의 어릴 적 꿈을 담아 만든 '네버랜드'에도 수시로 어려운 형편의 어린이들을 불러모아 즐거운 시간을 선물했다. 숱한 추문으로 얼룩진 인생이었지만 음악 외에 그의 인생을 지배했던 가치는 박애였다.

마이클 잭슨은 한국 첫 공연을 위해 방한한 지난 1996년 10월 김수환 추기경을 방문 해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마이클 잭슨 1958~2009] 90년대 호화 생활 빚만 4억~5억 달러

 

그의 재산은

 

초호화판 생활로 유명했던 마이클 잭슨이 남긴 재산은 얼마일까.

외신들은 마이클 잭슨이 4억~5억달러(약 5130억~6420억원)의 빚을 남긴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는 지난 30여년간 음반제작과 전속계약, 광고로 30억~40억 달러(약 3조8000억~5조1000억원·월스트리트 저널)를 벌어들였으나 과도한 소비와 법적 분쟁으로 재산을 거의 탕진한 것으로 알려졌다.

마이클 잭슨은 '오프 더 월'(1979), 1980년대 '스릴러'와 '배드', 1990년대 '데인저러스'와 '히스토리'가 세계적 베스트셀러에 등극하면서 억만장자가 됐다. 91년엔 일본 소니사와 10억달러의 전속계약을 맺었다. 88년 1700만달러를 들여 만든 캘리포니아주의 '네버랜드'의 부동산 가격이 급등, 95년 1억3000만달러까지 치솟았다.

하지만 90년대 들어 초호화 생활과 아동 성추행 사건으로 인한 법정비용 등으로 빚이 늘었고, 건강문제가 겹치면서 그 규모가 눈덩이처럼 불었다. 결국 아끼던 네버랜드마저 다른 부동산업체에 넘기고 올해 초부터는 LA 벨 에어(Bel Air)에 월세(매달 10만달러)를 들었다. 외신들은 "잭슨이 이런 어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12년 만에 런던 컴백콘서트를 계획했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그의 '정신적 멘토'였던 제시 잭슨 목사는 25일 언론에 "그가 아프리카에 테마파크를 지을 계획이었으며, 그는 결코 파산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프린스 마이클, 패리스, 프린스 마이클 2세 등 세 자녀에게 돌아갈 유산의 내용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잭슨은 생전 자서전 작가인 이언 핼퍼린에게 "아이들을 위해 미공개곡 100여 곡을 유산으로 남기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

 

 

 

 

 

[마이클 잭슨의 사망 뉴스에 온라인매체 압승]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의 사망은 인터넷 세계에 또 다른 이정표를 세웠다. 바로 전통 미디어와의 경쟁에서 온라인의 승리를 다시 한번 확인하는 계기가 됐다.

지난 25일(현지시각) 미국 연예전문사이트 TMZ닷컴이 '팝의 황제' 잭슨의 입원과 사망 소식을 신문, 방송 등 전통 매체보다 한 시간 이상 먼저 보도했다. 이 보도가 트위터 등을 통해 전 세계로 퍼져 나가면서 야후와 구글, 페이스북 등 주요 인터넷 사이트에서는 수백만 명이 거의 동시에 같은 소식을 찾아나서는 유례 없는 상황이 펼쳐졌다.

접속자 급증으로 트위터 등 일부 사이트 서버에 과부하가 걸렸고, 세계 최대 검색사이트 구글은 해킹이나 바이러스에 인한 현상을 의심해 비상조치까지 취했다.

구글은 "마이클 잭슨관련한 검색이 급증해 처음에는 해커들의 공격이라고 생각했다"며 “(자동으로 접속하는 해커를 막기 위해) 25분 동안 이용자들에게 검색 전에 모니터에 보이는 특정 문자를 입력하게 하는 조치를 취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렇게 사이버 공간이 떠들썩한 반면 전통 언론매체는 한 시간이 지나서야 잭슨의 사망 소식을 전하기 시작했다. 타임워너사의 웹포털 AOL과 텔레픽처스 프로덕션의 합작사인 TMZ는 이 기사를 통해 인터넷 매체가 신문, 방송 등 기존 매체를 능가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

야후는 "마이클 잭슨 사망은 (인터넷 역사에서) 분명히 중요한 사건"이라며 특정 사건 관련 야후 뉴스 방문자 수가 1640만 명을 기록해 종전 최고 기록인 1510만 명을 넘었다고 밝혔다. 또 잭슨 사망 이후 24시간 동안 전송된 트위터 메시지를 분석한 결과 관련 내용이 전체의 16%를 차지했고, 지난 2주 동안 계속 1위를 지켜온 이란 대통령선거 관련 내용은 2% 미만으로 떨어졌다.

TMZ닷컴 하비 러빈 편집장은 "세계의 모든 언론매체로부터 '확실하냐?'는 전화를 받았다"며 "참 이상한 질문이다. 우리는 진실이 아니었다면 보도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것은 이렇습니다] Q: 마이클 잭슨과 자녀들의 피부색은 왜 다른가

 

25일 미국에서 숨진 팝스타 마이클 잭슨의 자녀들 사진을 보면 모두 백인인 듯합니다. 잭슨이 백인 여성과 결혼했었다고 하지만 아이들은 전혀 혼혈 같지 않은데 무슨 사연이 있습니까.

― 서울 중구 독자 이정민씨

A: 모두 인공수정으로 출산해 자녀들은 백인

한현우 엔터테인먼트부 영화팀장

마이클 잭슨에게는 두 아들 마이클 조지프 잭슨 주니어(12·애칭 '프린스')·프린스 마이클 잭슨 주니어(7·애칭 '블랭킷')와 딸 패리스 마이클 캐서린 잭슨(11), 세 자녀가 있습니다. 이 아이들은 모두 인공수정에 의해 태어났으며, 생물학적 아버지가 누구인지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잭슨은 첫 번째 아내이자 엘비스 프레슬리의 딸인 리사 마리 프레슬리(41)와의 사이에 자녀가 없습니다. 큰아들 마이클과 딸 패리스는 잭슨의 두 번째 아내 데보라 로우(50)가 생모입니다. 잭슨의 간호사였던 로우는 1996년 잭슨과 결혼해 3년 뒤인 99년 이혼했습니다.

로우는 2004년 한 인터뷰에서 "두 아이 모두 인공수정으로 낳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때까지 잭슨은 줄곧 "내가 아이들의 생부"라고 말해왔습니다. 서구 언론들은 아이들의 피부가 흰 데다 흑인인 잭슨의 성형수술 전 모습을 찾기 어렵다는 점을 들어 "정자은행에서 백인의 정자를 받아 로우가 낳았을 것"이라고 보도해왔습니다. 로우는 이혼 당시 "잭슨과 아이들, 결혼생활에 대해 절대 말하지 않겠다"는 동의서를 썼습니다.

막내아들 프린스는 잭슨이 두번의 결혼과 이혼을 거친 뒤인 2002년 태어났습니다. 이 아이에 대해 잭슨은 "나의 정자를 제공받은 대리모가 낳은 아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 아이의 생부 역시 잭슨이 아닐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입니다. 잭슨은 이 아이가 돌도 지나기 전 아이를 오른손에 붙든 채 호텔 4층 발코니 난간 밖으로 내밀어 팬들에게 보여준 행동으로 아동학대 스캔들에 휘말렸었습니다.

잭슨은 아이들과 외출할 때 아이들 얼굴에 나비 가면이나 베일을 씌워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이에 대해 그의 전처 로우는 "그것은 나의 뜻이었다"며 "아이들을 납치하겠다는 협박을 받은 적이 있어 (못 알아보도록) 얼굴을 가렸다"고 말했습니다.

 

 

 

 

 

 

 

[마이클 잭슨 '그때 그사건' 10장면]

 

전 세계를 사로잡았던 ’팝의 황제’에서 아동 성추행 혐의로 재판정에 서기까지..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50세를 일기로 숨진 마이클 잭슨은 팝스타로서 정상의 자리에 올랐다가도 한순간에 씻기 어려운 불명예를 안고 추락을 거듭하는 굴곡진 삶을 살았다.

미국 시사 주간지 타임은 26일 인터넷판에서 마이클 잭슨의 생애에서 전환점이 됐던 사건 10가지를 선정, 보도했다.

다음은 시간 순서대로 간추린 내용.

◇ ’잭슨 파이브’ 결성 = 아홉명의 형제 중 일곱째인 잭슨은 형 네명과 함께 ’잭슨 파이브’를 결성, 1968년 8월 베벌리 힐스의 한 클럽에서 첫 공연을 열었다.

첫 싱글 앨범인 ’아이 원츄 백(I Want You Back)’이 1970년 1월 빌보드 차트에서 1위에 오르면서 돌풍을 일으켰다.

◇ ’스릴러’로 세계를 사로잡다 = 1982년 내놓은 ’스릴러(Thriller)’로 단숨에 세계적 스타로 떠올랐다. 이 앨범은 4천500만 장이 팔려나가면서 역사상 최다 판매 기록을 남겼다.

타임은 당시 “잭슨은 비틀스 이후 최대 거물”이라고 선언했다.

◇ 트레이드 마크는 ’흰장갑’ = 1983년 TV 쇼에서 왼손에만 크리스털로 뒤덮인 흰 장갑을 끼고 무대에 올라 ’빌리 진(Billy Jean)’을 부르면서 ’잭슨 스타일’을 유행시켰다.

흰 장갑은 잭슨의 트레이드 마크가 됐으며, 2006년 이베이(ebay)에서 3만5천 달러에 팔린 것도 있다.

◇ ’불꽃’ 투혼 = 25살이던 1984년 펩시 광고를 촬영하던 잭슨은 무대에서 ’빌리진’을 부르던 도중 특수 효과로 쓰였던 폭죽에서 불꽃이 튀어 머리카락으로 옮아붙으면서 2도 화상을 입었다.

◇ 잊을 수 없는 ’문워크’ = 딱 달라붙는 검은색 스키니 바지에 눈부신 흰양말을 신고 무대 위에서 미끄러지듯 뒷걸음치는 ’문워크(moonwalk)’는 1983년 TV쇼에서 처음 선보였다. 이듬해 ’빌리진’ 뮤직비디오에서 다시 등장하면서 잭슨을 대표하는 아이콘이 됐다.

◇ ’피터팬’을 꿈꾸다 = 1987년 캘리포니아 인근에 1천133만㎡ 넓이의 대저택 ’네버랜드’를 세우고 놀이기구와 동물원 등을 갖춘 ’꿈동산’으로 꾸몄다.

그러나 잭슨은 빚더미에 올라앉으면서 네버랜드 소유권을 지난해 자신이 일부 지분을 가진 회사인 시카모어 밸리 랜치 유한책임회사에 넘겨야 했다.

◇ 깜짝 결혼 = 1994년 5월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록큰롤의 제왕’ 엘비스 프레슬리의 딸인 리사 마리 프레슬리와 비밀 결혼식을 올려 팬들을 놀라게 했다.

잭슨 부부는 그해 ’엠티비 비디오뮤직 시상식(MTV Video Music Awards)’에 나란히 등장해 공식석상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으나, 2년 만에 이혼했다.

◇ 왕의 몰락 = 2002년 독일 투어 당시 9개월 된 아들 프린스 마이클 2세를 호텔 발코니 밖으로 내놓고 흔드는 모습이 언론에 포착되면서 한순간에 ’팝의 황제’에서 ’아동 학대범’으로 몰락했다.

호텔 밖에 몰려있던 팬들은 두려움에 떨며 소리쳤으며, 잭슨은 “당시 무엇에 홀린 것 같았다”고 해명했다.

◇ 사생활 폭로 = 2003년 영국 언론인인 마틴 바시르가 잭슨과 단독 인터뷰한 내용이 공개되면서 세상을 놀라게 했다.

2시간 분량의 다큐멘터리에서 잭슨은 나이 어린 소년들과 한 침대에서 잠을 자고, 라스베이거스에서 가구를 사들이는 데 수백만 달러를 뿌려대는 것으로 묘사됐다.

◇ 아동 성추행 혐의 = 잭슨은 2003년 13세 소년을 성추행한 혐의로 네버랜드에서 경찰에 체포됐다. 2005년 재판에서 무죄 평결을 받지만 ’팝의 황제’의 이미지는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큰 타격을 입었다.

newglass@yna.co.kr

 

 

 

 

 

 

[마이클 잭슨, 그는 휴먼이었다 ]

 

마이클 잭슨이 심장마비로 오늘 세상을 떴다.


즉시 TV를 켰다. ABC-TV 리포터가 말한다. LA에서 몇 시간 운전 거리의 마이클 잭슨의 예전 거주지 네버랜드에 갔다 우연히 마이큰 잭슨을 마주쳤다고 말이 나온다.


마이큰 잭슨이 차량의 창문을 내리고 “함께 들어가지 않겠어요?”라고 물었고, 오케이 응답을 하니 마이클이 길을 안내하여 함께 들어갔다. 그 자리서 다른 이야기는 별로 하지 않고 인생사에 대한 말을 나누었고, 록앤롤의 황제라 불렸던 마이큰 잭슨에게도 저런 인간적인 면이 있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하는 면모를 보여주었다며 당시의 기억을 되살려 감회에 잠긴다. 그리고 리포터는 “그는 역시 휴먼이었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취재보도를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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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잭슨과 같은 세대인 필자는 지난 4반세기 동안 마이클의 음악과 같이 살아왔다. 그가 부른 음악에 남녀노소를 불문하여 모두 열광했고, 그가 춘 춤을 보고 모두들 황홀해 했다.


그를 처음 TV를 통해 “잭슨 파이브(Jackson Five)”의 일원이 아닌 솔로 싱어 ‘마이클 잭슨’을 대했던 때는 1983년도. 26년 전 일이다. 저녁에 집에 들어와 TV를 켜니 마이큰 잭슨이 "Beat It"와 “Billie Jean"을 부르며 춤을 추는 게 아닌가.


순간 강렬한 비트 사운드에 현란하면서도 매끈하게 정리 된 리드미컬한 춤은 나의 눈을 단숨에 매료시켰다. 완전히 율동에 취해 Moonwalk의 춤을 추는데 저게 사람인가 유령인가 하는 의심 속에 나도 모르는 찬탄사가 연발 터져 나왔다.

                            
                                   

                                                                               Billie Jean      

        

다음날 당장 타워레코드로 달려갔다. 마이클 잭슨의 카셋트 테이프를 구입해 며칠간 나의 18번이 되어 그 노래만 들었다.


그로부터 나는 참으로 오랜 기간 마이클 잭슨의 음악에 심취했고, 그가 언제 TV에 나온다면 VCR의 자동녹화기를 작동시켜 마이클 잭슨의 거의 모든 공연을 다 관람했다.


그러나 그의 인기 절정은 그를 그 자신도 모르게 타락시키고 있었다. 가늠할 수 없이 몰려드는 돈과, 주체할 수 없이 몰려오는 팬과 유명 인사들의 유혹(?)의 손길에 본연의 음악 세계에서 서서히 그 영향력을 잃어갔다.


마이클은 성격에 있어서 여성 성격이 진하게 박혔고 유별나게 남자 아동들을 좋아했다. 그를 가까이 한 아동들은 마이클 잭슨과 한 집에서 함께 기거하는 것을 원했고, 마이큰 잭슨은 이들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어린 아동들과의 생활을 몇 년 할 동안 마이큰 잭슨의 침실에서는 무슨 일들이 벌어졌는지 당사자들 외에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마이클 잭슨과 잠을 잔 아동들은 몇 년의 기간을 통해 자란 후 마이클 잭슨과 침실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아이들은 부모들에게 고백을 했고, 부모들은 믿었던 도끼에 발등 찍혔다는 배신감과 동시에 금전적으로 득을 볼 수 있는 호재로도 생각했다.


아동의 부모들은 변호사에게 이 사실을 의뢰를 했고, 변호사는 거금의 의뢰비로 받을 수 있다는 꿈을 안고 세상에 공개하여 마이클 잭슨을 압박했다. 마이클은 결국 합의를 보고 거금의 위자료를 냈다.


마이클 잭슨은 한때 7억5천만 달러의 재산가에까지 올랐었다 아동 성추행 스캔들로 말미암아 파산 지경에 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그에 대한 팬의 열기는 식지 않았던 고로 공연을 통해 돈을 다시 벌어들을 수 있었다. 포브스 경제 잡지는 2003년도의 마이클 잭슨 재산은 3억5천만 달러라 밝혔다. 그러나 최근 몇 년 간 금전적 사정이 급격히 나빠져 몇 천억원 대의 빚에 쪼들린다는 뉴스가 간간이 나왔다.


                            

                                                                  Beat It, 1987년도 일본 공연

 

마이클 잭슨은 최근 들어 공연에 대한 의지를 불태우고 곳곳에서의 공연에 대한 계약을 넘보았다. 빚을 갚기 위한 강박관렴에서 무리수를 둔 것 같다. 장기간의 공기를 넘어 첫 공연의 행선지로 런던을 택했고 공연 일을 7월13일로 잡혀 있었다.


그러나 이 공연을 앞둔 리허설이 무리가 되었는지 심장이 마비됐다. 급히 엠뷸런스에 실려 UCLA 대학병원으로 호송됐지만 병원에 도착할 즈음 숨을 거두었다. 마이클 잭슨이 집에서 약물 투여 후 쓰러져 죽어 갈 당시 닥터가 현장에 없었던 관계로 UCLA 병원에서 헬기로 LA 검시부서로 옮겨져 부검에 들어갔다.


마이클 잭슨은 어려서부터 친아버지로부터 학대당한 전력이 있다. 그 때의 악몽이 근간까지 살아나 마이클을 괴롭혔다고 측근은 전한다. 여기에 아동들이 성추행을 받았다고 고발당한 배신감, 잦은 피부이식수술, 성형수술, 그리고 피부표백으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병의 합병증에 시달리다 몸이 허약해졌던 상태였을 것이라고 최근 뉴스가 말한다.


마이클 잭슨은 1990년대 중반 엘비스 프레슬리의 무남독녀와 결혼하기도 했다. 간호사와도 결혼 해 자손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당시 아동 성추행 사건을 은폐하기 위한 위장결혼이었다는 게 1990년대 당시의 평판이었다. 마이클은 결혼 후 2-3년 내 이혼했고 그 후 재혼은 없었다.


과거의 스캔들이 여러 번 있었음에도 마이클에 대한 팬들의 사랑은 여전하다. 오늘 LA의 많은 서점에 마이클 잭슨 책과 CD를 찾는 팬들의 전화가 많이 걸려온다고 로스앤젤레스 ABC-TV 방송 로컬 뉴스는 전한다.


Written by cacomfo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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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잭슨이 UCLA 메디컬 센터에서 숨을 거두었다고 사람들이 많이 보여 가봤습니다.

밤 6월25일 11시40분 경인데도 사람들이 아직도 많이 있었고 몇몇 사람들은 촛불들고 추모하고 있더군요.

크고 작은 수십대의 중계차량들이 즐비하게 주차되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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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ctures by cacomfort

 

 

 

 

 

 

 

[성공한 뮤지션.. 그러나 굴곡 많던 마이클잭슨의 인생]

 

이승우 기자의 퀘이사(quasa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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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 음악계의 큰 별이 졌습니다. '빌리 진' '윌 유비 데어' 등 많은 히트곡을 통해 팝의 즐거움을 일깨워 주었던 팝스타 마이클 잭슨(본명 마이클 조지프 잭슨)이 미국 현지시각으로 지난 25일 심장마비로 쓰러진 뒤 끝내 눈을 뜨지 못했습니다. 지천명의 마이클잭슨임에도 내달 13일 영국 런던의 O2 아레나 극장에서 열릴 단독 콘서트준비를 위해 많은 땀방울을 흘렸던 것으로 알려져 주변을 더 숙연케 하네요. 

 

마이클잭슨은 미국 인디애나주 게리에서 태어났습니다. 5세 때 형제들로 구성된 5인조 그룹 잭슨 파이브에서 리드싱어를 맡으며 노래 실력을 인정받았고, 1969년 즈음 자신이 직접 안무한 인상적인 춤을 노래와 함께 선보이기 시작하며 팝스타로 거듭났습니다. 1979년 제작된 '오프더 월'은 전 세계에서 1780만장이 팔려나갔으며, 1982년 '스릴러'에 수록된 9곡의 노래 가운데 7곡이 빌보드 톱10에 오르며 5890만장의 음반 판매고란 진기록을 세우기도 했죠.

 

'신이 내린 목소리'란 극찬을 얻으며 전 세계 많은 음악팬에게 인기를 얻었지만 그에게도 굴곡많은 인생은 찾아왔습니다. 1990년대 초반 아동 성추행 혐의로 조사를 받은 마이클잭슨은 2003년 또 한번 같은 혐의로 경찰에 체포되며 '아동 성추행자'로 낙인 되는가하면. 성형수술 부작용으로 인해 일그러진 자신의 모습이 언론에 공개되면서 '성형 중독자'란 꼬리표를 달기도 했죠.

 

결혼생활도 파란만장했습니다. 1994년 추억의 팝스타 엘비스 프레슬리의 딸 리사와 결혼에 골인하며 안정된 가정생활을 보이는가 싶더니만 2년 만에 파경을 맞은 뒤 담당 간호사였던 데비 로우와 재혼을 했지만 결국 3년 만에 이혼 하며 결혼생활에 실패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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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인생엔 성형 부작용만큼이나 희귀병도 함께 따라다니며 팬들을 안타깝게 했습니다. 늘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착용하고 외출에 나섰던 그의 모습을 보며 미국 언론은 백반증이란 희귀병과 대인 기피증 그리고 피부암으로 고통 받고 있다고 보도했죠.

 

한국과 인연이 깊었던 잭슨. 1996과 1999년 두 차례 국내에서 콘서트를 개최해 팬들과 만나기도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1998년 2월 25일 김대중 대통령 취임식에 외빈으로 참석해 눈길을 끌기도 했죠. 평소 평화와 화합을 외쳤던 만큼 남북한의 현실을 안타깝게 생각하며 판문점에서 평화의 콘서트를 주최하고 싶다는 의지도 보였습니다.

 

기자 역시 잭슨에 대한 추억은 남다르네요. 2006년 5월 27일 일본 도쿄 국립요요기경기장에서 MTV 재팬이 주최한 '비디오 뮤직 어워드 재팬'을 취재차 방문했을 당시 '레전드 어워드'를 수상하기 위해 참석한 마이클잭슨을 가까운 거리에서 만날 수 있었습니다. 당시 기자단의 대열에서 슬쩍 빠져나와 마이클잭슨에게 다가간 적이 있었는데요.(어쩌면 무모했던 취재와 접근방식이었으나, 마이클잭슨을 코 앞에서 대면할 수 있었던 순간이었습니다. 연예부 기자로 약 7년동안 활동하고 있지만, 그 가운데 정말 짜릿했던 추억으로 남은 것 같습니다.)  

비록 건장한 흑인 경호원의 제재로 인터뷰와 사진촬영은 실패했지만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그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평소 언론에서 언급했던 성형부작용으로 일그러진 모습도 성추행범의 흉측한 모습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다만 내 앞에서 환하게 웃음 지을때 살며시 보이던 얼굴의 잔주름이 세월의 흔적을 말해주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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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누가 뭐라해도 전 세계의 음악팬을 사로잡은 팝의 황제였습니다. 잭슨의 사망 소식이 알려지자 지금도 전 세계 언론 및 음악팬 사이에선 고인을 기리는 애도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마이클 잭슨, 부검서 약물 검출로 '추가 검사']

 

- 1차 부검 결과 외상 無, 급성 심박 정지 원인 규명 필요

▲ 故 마이클 잭슨



[이데일리 SPN 양승준기자]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의 사망 원인을 밝히기 위한 부검 결과, 외상의 흔적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26일 AP 등 외신에 따르면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검시소의 크레이그 하비 대변인은 이날 잭슨의 부검을 마친 후 타살 정황이나 외상 흔적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1차 부검 결과 잭슨의 사망 원인은 '급성 심박정지'(Sudden Cardiac Arrest)에 의한 것으로 추정됐다. 하지만 부검 결과 시신에서 약물이 검출돼 정확한 사인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독극물 검사 등 여러 추가 검사를 진행해야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비 대변인은 "추가 검사는 4~6주 정도 걸리며 최종 부검결과는 그 이후에나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경찰에 따르면 잭슨은 25일 의료진이 자택에 도착했을 당시 이미 급성 심박정지 상태였다. 개인 주치의 등 측근 등을 조사한 결과 잭슨은 사망 한 시간 전에 진통제를 투여했다. 그는 생전에 여러 진통제를 복용해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잭슨의 대변인 브라이언 옥스만은 "잭슨의 약물 과다 복용을 수차례 경고해왔다"고 말한 바 있다.

이를 종합해볼 때 마이클 잭슨이 심장 박동 정지 증세를 보인 것은 약물 과다 복용으로 인한 것이 아니냐는 목소리가 점차 힘을 얻고 있다.

한편, 잭슨은 25일 L.A에 있는 자택에서 심장 박동 정지 증세를 보여 인근 UCLA 메디컬센터로 옮겨졌으나 결국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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