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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대적배경
전두환 정권은 4·13호헌조치를 발표하고 통일민주당의 창당을 방해하는 등 국민의 민주화 열망을 억압하고 장기집권을 획책하였다. 한편 5월 18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박종철고문치사사건이 은폐되었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에 재야와 통일민주당은 연대하여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를 전국적 민주화투쟁의 구심체로 결성하였다.
6월 10일 국민운동본부는 ‘박종철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 및 민주헌법쟁취 범국민대회’를 개최하여 6월항쟁의 기폭제가 되었다. 같은 날 민주정의당 대표위원 노태우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자 전두환 정권의 간선제 호헌에 대한 국민의 저항이 급격히 확산되었다.
2. 전개과정
항쟁 이전
1987년 1월 14일 - 서울대 박종철, 경찰 고문으로 사망.
2월 7일 - 전국 주요 도시에서 "박종철군 범국민추도식" 및 도심 시위.
3월 3일 - "박종철군 49재와 고문추방 국민대행진" 및 시위.
4월 2일 - 서울대학교 학생 학부모 130여 명, 건대사태 등 시국관련 구속학생의 징계철회 요구하며 철야 농성.
4월 13일 - "개헌논의 유보"를 내용으로 하는 전두환 대통령 특별담화 발표 (4·13 호헌 조치).
4월 14일 - 김수환 추기경 등 각계 인사, 4·13 호헌 조치를 비난하는 시국 성명 발표.
4월 24일 - 가칭 "통일민주당 창당 방해 사건" 발생
5월 18일 - 박종철의 고문 치사 사건이 축소 은폐되었음이 폭로되었다. 이에 군사독재정권인 제5공화국 정권을 비판하던 국민들은 이를 접하고 크게 분노하였고, 이후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전국 각지에서 자주 일어났다.
5월 23일 - "박종철 고문살인은폐조작규탄 범국민대회 준비위원회" 결성 및 6월 10일에 규탄대회 갖기로 결정.
5월 26일 - 전두환 대통령, 고문치사사건에 대한 책임을 물어 노신영 총리를 이한기로 교체.
5월 27일 -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결성, "4·13 조치 철회 및 직선제개헌 공동쟁취 선언" 발표.
6월 9일 - 연세대생 이한열, 학교 앞 시위 중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부상 (7월 5일 사망).
항쟁 기간
6월 10일 -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주최로 성공회 교회인 성공회 서울주교좌대성당에서 "박종철군 고문치사 조작, 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 개최. 시민들도 택시운전사들이 저항의 뜻으로 차를 세우고 경적을 울리거나, 고등학생들이 민주화시위참여자에게 마실 물을 가져다 주는 등의 적극적인 참여와 지원으로 서울도심에서 민주화 시위가 있었다. 당시 성공회서울대성당에서는 감사성찬례때 피아노를 연주할 예전봉사자가 필요하다는 명분으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관계자가 경찰의 감시를 피해 교회안에 들어올 수 있도록 배려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민주정의당 전당대회에서 노태우 대표위원을 차기 대통령 후보로 지명.
이후 시위는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어 6월 26일 - 전국 37개 도시에서 국민평화대행진 시위가 전개되었고 3,467명이 경찰에 연행되었다.
6월 29일 - 노태우 민정당 대표위원이 8개항의 시국수습 내용을 포함한 6·29 선언을 발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와 재야 단체는 즉각적인 개헌작업 착수와 양심수 전원석방 및 수배해제를 촉구하는 성명 발표.
3. 결과
6월 29일 노태우 대통령후보는 국민들의 대통령 직선제 뜻을 받아들이겠다는 내용의"시국수습을 위한 8개항"을 선언하였다. 국민들의 민주화 열망이 빛나는 승리를 거두는 순간이었다. 이러한 6월 민주항쟁은 진정한 민주화 시대의 발판이 되기에 충분하였다. 사회 각 부문마다 군사문화 추방과 민주화 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우리 민족의 최대과제인 민족통일의 물꼬도 조금씩 터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13대 대통령에 당선된 노태우 대통령은 자신이 약속했던 6.29선언의 민주화 조치를 그의 임기가 끝날 때까지 실천하지 않았다.
6월 민주항쟁 이후 군사정권의 강력한 힘도 국민과 염원과 희망 앞에서는 그 힘을 잃었고 마침내 대통령 직선제로의 개헌이 이루어졌다.
4. 우리나라 민주주의 발전에 미친 영향
6월항쟁은 결코 6·29선언으로 종식되지 않았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새로운 투쟁의 파고를 준비하는 격렬한 몸부림이라고 할 수 있었다.
6·29선언에 의해서 많은 사람들이 대통령 선거라는 중대한 승부에 몰두하기 시작했을 때, '우리는 이제부터다'라고 외치며 박차고 일어선 사람들이 있었으니 그들은 이 사회에서 가장 큰 집단을 이루고 있으면서 동시에 이 나라 경제를 두 어깨에 걸머지고 있는 노동자들이었다.
노동자들은 6월항쟁을 통해 꿈쩍도 하지 않을 것 같았던 권력이 거대한 민중의 힘에 굴복하는 것을 두 눈으로 확인했다.
자신의 힘을 깨달은 것이다.
이러한 자신감이 선진 노동자들로 하여 그 자신의 노동현장에서 투쟁을 적극 주도하도록 만들었다.
출처 : 백과사전과 인터넷 6월 항쟁기념관에서 (발췌: 네이버 지식인)
1. 배경 : 1960년3월15일 정,부통령선거 (3.15 부정선거)
2. 원인 :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장기 집권을 위해 3.15부정 선거를 합니다.
대통령를 한번 밖에 못하는 것을 초대 대통령에 한하여 두번 할수 있다.라고
법을 고쳐서 두번 대통령을 했습니다. 그런 뒤 대통령은 세번도 할 수 있다라고
법을 다시 고쳐 선거를 치룹니다. 이것을 삼선 개헌이라 하고
이때 한 선거가 3.15 부정선거 입니다.
3.15 부정선거는 잘못된 개헌 뿐만 아니라 돈으로 사람을 매수하고 협박하는 등
여러 부정적인 방법으로 당선이 되었습니다.
결국 국민이 이런 부정에 저항하여 벌인 투쟁이 4.19형명입니다.
3. 영향 : 영향을 끼친 부분은 여러 곳이 있지만 그중에서 단연 돋보이는 것은
현재 우리나라의 헌법에 "4.19 혁명의 정신을 개승한다." 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것은 선거에 의하여 선출된 대표 중에서 유권자들이 부적격하다고 생각하는 자를
임기가 끝나기 전에 국민투표에 의하여 파면시키는 제도인 국민소환을 암시하는
것으로 민주정부로의 발전을 의미합니다.
4. 결과 :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고 장면 내각이 들어선다.
5. 전개 : 1960년 4월 12일자 부산일보에 머리와 눈에 최루탄이 박힌채 전날 마산중앙부두에 떠로은 김주열 군(당시 17세0의 시체 사진이 실렸다.
김주열의 사진이 공개되자 마산에서는 12일부터 대대적인 시위가 벌어졌다. 이날의 시위는 3월 15일 시위에 이은 제2차 마산시위였는데, 이것은 8일간이나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다. 시민과 학생들은 매일 수만명씩 몰려나와 시위를 전개 하였고, 마산 경찰서와 파출소, 자유당의 의원이었던 한윤수의 사무실과 반공청년단 사무실에 대한 공격도 계속 되었다.
거리에서는 바리케이트가 설치되었고, 경찰은 실탄 사격을 가하였다. 시민들과 학생들은 멈출줄도 모르고 싸움을 전개하였다. 마산 시위는 사태를 전국으로 확신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4월 18일에는 서울 고려대생 4천여명이 시위를 벌이다가 깡패들의 습격을 받아 많은 부상자를 냈다. 그러자 상황은 급격히 발전하였다. 4월 19일 전국27개대학생이 일제히 시위에 나섰다. 학생들은 국회 의사당이 있는 태평로 일대를 완전히 메웠고, 일부 학생들은 이승만 대통령과의 담판을 요구하면서 경무대로 향했다.
이날의 시위는 2월 18일 대구학생 시위, 3월 15일 마산시위를 잇는 자유당 정권의 부정선거에 대한 항의가 전국민적 항쟁으로 확산 되었 가는 과정에서 일어난 최대시위였다.
이로써 독재와 부패에 염증을 느낀 국민들의 마음이 자유당 정권을 완전히 떠나버렸음이 확인되었고, 뒤이어 23일 장면 부통령이 정식으로 사임하고 25일에는 삼엄한 게엄령 아래서 대학교수단의 시위가 일어났다.
결국 26일 이승만 대통령은 라디오를 통해 하야 성명서를 발표했고 27일 오후 2시 국무원 사무국을 통해 대통령 사임서를 성식으로 국회에 제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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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광주 민주화 운동
1. 배경 : 12.12 쿠데타 (1979년)
2. 원인 : 10.26 사건(1979년)으로 박정희 대통령은 죽음을 맞이 한다.
국가는 혼란상태에 빠진다. 이때 전두환은 군대를 동원하여
정권을 강탈한다. 이에 반대하여 전국적 시위가 벌어진다.
하지만 유독 광주에서 열정적 시위가 진행되고 이것이 5.18로 발전됩니다.
3. 영향 : 1980년 이후의 모든 민주화 투쟁의 정신적 근간이 되었다.
4. 결과 : 민중가요의 출연, 전국적 규모의 사회단체가 조직되는 등
우리나라 민주화 투쟁 문화의 발전을 가져온다.
5. 전개 : 1979년 10·26사태이후 서울의 봄은 신군부의 유신연장 음모에 의해 안개정국 속에서 혼미를 거듭하고 있었다. 1980년 3월 신학기부터 각 대학에 학생회와 평교수회가 부활되고 긴급조치로 밀려났던 해직교수와 제적학생들이 학교에 복귀함으로써 학원민주화 열풍이 일기 시작했다.
1980년 4월 이후 전국적으로 확산된 학생들의 민주화투쟁과 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을 진압하고 정권장악을 목적으로 일부 정치군인들이 1980년 5월 18일 0시를 기해 비상계엄 전국확대를 단행하였다.
5월 18일 오전 전남대 정문 앞에서 벌어졌던 계엄군의 만행을 알리기 위해 학생들이 시내에서 가두시위를 하자 계엄군은 오후 3시부터 시내로 투입되어 진압하기 시작하였다.
5월 20일 항쟁 3일째, 오전에는 소강상태였으나 오후가 되면서 광주 시가지는 다시 팽팽한 대치국면으로 긴장감이 고조되었다.
밤 11시경 광주역을 지키고 있던 공수부대와 시위대의 공방전이 격렬해지고 시위대가 차량을 앞세워 군의 저지선을 돌파하려하자 일제히 발포를 하였다. 이것이 시민을 향한 공수부대의 최초 발포였다.
5월 21일은 석가탄신일로 공휴일이었다. 광주시민들은 어제의 참상을 뒤돌아보고 계엄군의 만행에 항의하기 위해 아침부터 금남로로 모여들었다. 오후 1시 계엄군은 시민을 향하여 사격을 하였다.
항쟁 5일째 되는 22일, 시민군이 도청을 장악하고 어지러운 거리를 자발적으로 청소하는 등 질서를 회복해가기 시작했다.
5월 22일 거센 시민의 항쟁에 밀려 계엄군이 일시 퇴각했지만 이미 저질러진 엄청난 사태 앞에서 쌍방 모두 슬기로운 수습이 요망되었다.
결국 무기반납을 거부하고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하는 새로운 항쟁지도부가 탄생하게 되었다.
5월 26일 새벽 계엄군이 탱크 등 중화기를 앞세우고 농촌진흥원 앞까지 진출하자 수습대책위원들은 일명 '죽음의 행진'을 감행하여 무력진압을 저지 만류하였다. 이것은 계엄군의 무력 진압작전의 예고였다.
27일 새벽 4시, 도청 주변에서 총성과 수류탄이 터지는 소리가 울려왔고 도청탈환을 향한 계엄군의 기관총 소리는 밤하늘을 찢는 듯 했다. 구식 무기로 마지막까지 항전하던 지도부는 피를 흘리면서 쓰러져갔다. 진압 끝! 그리고 시민군 생존자는 시체더미 속에서 '총기소지자' '특수폭도'로 분류 체포되어 군부대로 이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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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0민주항쟁 >> 일반적으로 6월 민주 항쟁이라 합니다.
1. 배경 : 5공화국(전두환)의 독재 정권
2. 원인 : 전두환 대통령은 1987년 4월 3일 호헌선언을 통하여 현재로써는
직선제로 개정할 의사가 없음을 알린다. 이것은 장기집권의 음모라고 할 수 있고
또한 그 뒤를 이을 대통령 후보로 노태우가 후보직에 오른다.
그리고 이 시기에 박종철 고문치사건이 일어나 더욱 국민의 저항을 부추기게 된다.
그리하여 이 상황을 극복하고자 대학생이 중심으로 6월항쟁이 일어납니다.
3. 영향 : 6월 항쟁 또는 5.18처럼 그뒤에 일어나는 많은 투쟁의
발판이 되었고 많은 시민들 또한 시위대를 지지하게 됩니다.
4. 결과 : 차기 대권을 노리며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던 노태우 민정당 원내대표는 1987년 6월 29일 이른바 6.29 선언을 발표하여 국민들의 요구를 전적으로 수용하게 되었는데
1. 대통령 선거 방법을 직선제로 한다.
2. 김대중씨를 비롯한 해금 정치인들을 사면 복권한다.
3. 학원의 민주화를 점진적으로 추진한다.
4. 지금까지 금지곡으로 분류되던 곡들을 해금한다.
등이 있습니다.
5. 전개 : 1980년대 들어서 수많은 민주화 운동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1982년에 있었던 미문화원 방화사건이었다. 당시 주범이었던
문부식씨는 1980년의 광주민주화 항쟁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묻기 위하여 방화를
했다고 주장했다. 이후 1986년 건국대학교에서는 수많은 대학생들이 민주화를
요구하며 학교 건물 6개동을 점령하여 시위를 일으키니 이 사건이 바로
건대사태였다. 그리고 비슷한 시점에 5월 3일 인천에서는 전쟁터를 방불케하는
시위가 벌어지니 이 사건이 5.3인천사태였으며 이후 박종철군 고문 치사사건이
일어나면서 본격적으로 전국민적인 봉기가 일어나게 되었는데 특히 1979년 10월
부마항쟁을 경험한바가 있던 부산지역에서는 부산 출신의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으로 인하여 더욱더 열을 올려 본격적인 민중항쟁으로 이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특히 1987년 한해동안 계속되었던 민주화항쟁 기간중에서
6월 10일에 있었던 민중 봉기는 광주 5.18 민주화항쟁을 연상케 할 정도의
엄청난 시위가 전개되어 지금까지도 1987년 6월 항쟁의 대명사적인 사건이름으로
불리우게 되었던 것이다.
출처 : endmaking(네이버 지식인)
이런 속에서 1985년 2월 12일 실시된 총선의 결과는 국민들의 5공 정권에 대한 분노를 상징적으로 드러내준 것이었다.
1984년 11월 30일 3차 해금으로 풀려난 구신민당 출신 전직 의원들은 1985년 1월 18일 김대중·김영삼의 지원을 받아 신한민주당(약칭 신민당)의 창당 대회를 서울 앰베서더 호텔에서 가졌다. 대의원 523명이 참가한 창당 대회는 이민우 창당준비위원장을 당 총재로 뽑고, 김녹영, 이기택, 조영하, 김수한, 노승환 등 5명을 부총재로 선출하였다. 이 날의 신민당 창당은 2월 12일로 예정된 제 12대 총선을 대비한 것이었다. 신민당 창당을 계기로 민주 세력의 결집은 날로 가속화되었다. 투표일이 가까워지면서 이 같은 '신당바람'은 서서히 증폭되었다. 이는 선거일 4일 전인 2월 8일 미국 망명 2년여 만에 김대중이 귀국하면서 절정을 이루었다. 당시 정부 여당(민정당)은 김대중의 귀국을 거부하면서, 그가 귀국하면 투옥시키켔다고 위협하기도 하고, 신변 안전을 이유로 귀국을 만류하기도 하던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김대중은 귀국을 강행했다. 국내에서는 김영삼이 죽음을 각오한 23일간의 단식으로 흩어진 야권을 결속했고, 국외에서는 김대중의 죽음을 각오한 귀국으로 민주화 세력을 결집, 전두환 정권과의 일전 불사가 눈앞에 다가오고 있었다.
선거 결과는 놀라운 것이었다. 선거 결과 지역구 총 의석수 184석 중 신민당은 92개 지구당에서 50명이 당선되어 기염을 토했다. 집권당인 민정당이 87석을, 그리고 종래의 제1야당이었던 민한당은 26석에 불과한 부진한 성적을 기록하였다. 이에 따라 민정당은 전국구 61석을 합쳐 148석, 신민당은 17석을 합쳐 67석, 민한당은 9석을 합쳐 35석이 되었다. 이로써 신민당은 민한당을 물리치고 창당한지 불과 25일만에 제1야당으로 부상하였다.
당시 신민당이 12대 총선에서 '신당 돌풍'을 일으킨 배경에는 전두환 정권의 폭압적인 정치에 대한 반감을 배경으로, 체제 내에 안주해 온 제도권 정당에 대한 국민의 회의와 반발이 깊어진데다 야당다운 야당이 있어야겠다는 국민 의식이 가장 크게 작용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이후 신민당은 김대중·김영삼의 권유에 따라 민한당의 인사들이 대거 입당함에 따라 일시적이나마 야권 통합을 이룩하게 되었다. 신민당은 5월 9일 민한당 부총재 이태구의 입당으로 헌정 이후 최대 의석인 103석을 확보, 거대 야당으로 발돋움하였다. 이런 힘을 배경으로 국회가 열리자 신민당은 직선제 개헌을 강력히 요구하였고, 민주화 운동 세력도 군사 독재 정권 타도와 이를 위한 직선제 개헌을 적극 주장하였다. 집권세력은 개헌을 요구하는 대중 집회를 물리적 힘으로 탄압하면서 국민의 민주화 요구를 사회 혼란을 조성하는 행위로 매도하였다.
권인숙과 박종철
권인숙은 대학 출신으로 노동 운동에 뛰어들어 비합법단체에서 활동하던 여성이다. 그녀가 1986년 6월 부천 경찰서에서 추악한 성*고문을 받았다는 사실을 폭로하면서 온 나라가 발칵 뒤집어진다. 권인숙 의 진솔하고 도도한, 그리고 당당한 눈물의 법정 발언은 독재 정권의 부도덕성과 폭력성을 들추어내기에 충분했다.
그렇게 해를 넘기고 이번에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터졌다. 박종철은 반정부운동을 하던 친구의 행방을 대라는 남영동 대공분실 수사관들의 요구에 불응하며 끔찍한 고문을 견디다가 목숨을 잃은 것이었다. (1987.1.14) 다음 날 치안본부장은 박종철이 죽은 까닭을 "냉수를 몇 컵 마신 후 심문을 시작, 박종운 군의 소재를 묻던 중 갑자기 '억!' 소리를 지르면서 쓰러져, 중대 부속병원으로 옮겼으나 12시경 사망하였다"고 발표하였다. 또한 이 자리에 같이 있던 치안 본부 대공 담당 차장은 "책상을 '탁' 치니 박군이 '억!'하고 쓰러졌다."라고 덧붙여 설명하였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경위 발표는 시민적 공분을 더욱 부채질하였다. 어느 시민은 " 박군 관계 신문 기사를 보면서 부부가 함께 울어버렸던 우리들의 아픔을 당신들은 정녕 아는가?"라는 글을 언론사에 보내기도 했다. 이제 더 이상 국민들은 80년 민주화 열망을 짓밟고 등장한 제 5공화국을 자신들을 대표하는 정부로 인정하지 않았다. 국민들의 억눌린 감정은 한꺼번에 터지기 시작했다. 관련자 처벌 및 대통령 직선제 개헌 요구 시위가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했다.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으로 정국은 중대 고비를 맞게 된 것이다.
4.13 호헌 조치 그리고 6월....
이런 상황 속에서 4월 13일 전두환 정권은 평화적 정권 교체란 명분을 앞세워 국민의 여망이던 직선제 개헌을 하지 않겠다는 이른바'4.13 호헌(護憲)조치'를 선언하였다. 4.13 호헌 조치 뒤에 민주화를 바라는 국민 대중의 결의는 더욱더 강해졌다. 각계 각층에서 호헌 철폐를 요구하는 시국성명을 내고, 각계와 각 지역을 대표한 2200여 명의 발기인이 참가하여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를 만들었다. 국민운동본부는 박종철 고문살인을 규탄하고, 호헌 철폐를 요구하는 국민 대회를 6월 10일 대규모로 벌이기로 결정했다. 6월 10일 그날은 민정당의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가 열리기로 예정되어 있던 날이기도 했다. 6월 5일 국민운동본부는 국민대회 행동 요강을 발표한다.
.. 2. 오후 6시 국기 하강식을 기하여 전 국민은 있는 자리에서 애국가를 제창한다. 애국가가 끝난 후 자동차는 경적을 울린다. 전국 사찰, 성당, 교회는 타종을 한다. 국민들은 형편에 따라 만세 삼창(민주헌법 쟁취 만세, 민주주의 만세, 대한민국 만세)을 하거나 제자리에서 1분간 묵념을 하며 민주주의 쟁취의 결의를 다진다
3. 경찰이 폭력으로 대회 진행을 막는 경우 전국민은 비폭력으로 이에 저항한다. 연행을 거부한다. 연행되면 일체의 묵비권을 행사한다.
4. 전국민은 오후 9시부터 10분간 소등을 하고 KBS, MBC 뉴스 시청을 거부함으로써 국민적 합의를 깬 민정당의 6.10대통령 후보 지명대회에 항의한다....
7. 또 한번 부탁하거니와 6.10 국민대회는 철저하게 평화적으로 참여해 주시기를 바라며 폭력을 사용하거나 기물 파손 등을 자행하는 사람은 국민대회를 오도하려는 외부세력으로 규정한다....
이런 움직임에 당황한 정부는 6월 10일 며칠 전부터 6.10대회를 불법 집회로 규정하고 경찰 병력을 총동원하여 이를 원천봉쇄 한다는 방침을 세워 놓았다. 이에 따라 6월 7일부터 주요 대도시에서 검문·검색이 강화되었으며, 인쇄소 등에 대한 경찰의 경계와 수색도 심해졌다. 또한 전국 경찰에 갑호 비상을 발령하는 한편 버스·택시 회사에 경음기를 떼어내고 교대시간도 바꾸도록 종용하였다. 심지어 행인들의 애국가 합창을 막기 위해 오후 6시에 시행하던 애국가 옥외 방송도 금지시켰다. 그리고 대회 전날인 9일부터는 민주인사에 대한 가택 연금을 실시했으며 전국 110개 대학을 전격 수색하여 시위용품을 압수하기도 했다.
드디어 6월 10일이 밝았다.
오전 11시 15분 서울시 송파구 잠실 체육관에서 민정당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12 30분 채문식 전당대회 의장이 투표 결과를 발표한 뒤 노태우 민정당 대표가 민정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음을 선언했다. 전두환 대통령이 노태우 후보와 손을 잡고 연단 앞쪽으로 걸어나가 번쩍 치켜들었다. 그것은 신군부 내의 권력 승계를 위한 한판의 축제였다. 그러나 바로 그 시간 체육관 밖에서는 또 하나의 '축제' 가 진행되고 있었다.
"뎅그렁 뎅그렁 뎅그렁..."
서울시청 건물에 걸린 대형 시계의 숫자가 12:00로 변하는 순간 도로 건너편 성공회 대성당 종탑에서 종소리가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잠시 후 종탑 꼭대기에 잿빛 가사를 걸치 스님(지선스님)과 연한 보라색 블라우스에 쉬어링 치마를 입은 30대 중반의 여성(소설가 유시춘)이 나타났다. 스님이 마이크를 잡고 성명서를 낭독했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온 국민의 이름으로 민정당의 대통령 후보 지명이 무효임을 선언한다..."
국민운동본부 지도부를 대표하여 종탑에 올라간 그들은 그날 오후 6시부터 시작될 6.10국민대회의 성공을 예감했다.
드디어 6시 약속된 시간이 되자 거대한 함성이 도심을 울렸다. 구호는 '호헌 철폐', '독재타도'.
학생들이 먼저 나서고 시민들이 속속 동참하기 시작했다. 연세대생 이한열이 전날인 9일의 시위 도중 최루탄 파편에 맞아 중태에 빠졌다는 뉴스로 인해 불에 기름을 부은 듯 규모가 커지면서 급속히 전개되어갔다. 차들은 일제히 경적을 울렸다. 시위대와 경찰은 밀고 당기는 공방전을 계속했다. 거리는 마치 포연에 휩싸인 전쟁터 같았다. 6.10국민대회는 서울 부산 대구 공주 인천 대전 등 대도시를 비롯하여 전국 22개 지역에서 24만 여명이 참여하는 대규모 가두 시위로 발전하였다. 경찰의 강경 진압으로 시위가 점차 격화되면서 시청 한 곳, 파출소 열 다섯 곳, 민정당 지구당사 두 곳 등이 파손되었다. 경찰은 그날 전국에서 3831명을 연행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그날 저녁 명동성당에서는 8백여명의 학생과 시민들이 농성 투쟁을 시작하고 있었다.
6월 10일 밤부터 시작되어 15일까지 5박 6일 동안 진행된 명동성당 농성 투쟁은 민주화를 염원하는 국민들의 희망이었다. 명동성당을 중심으로 그 희망의 파문은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시민들은 명동성당에서 농성하던 사람들에게 성금은 물론 빵, 음료수, 의약품 등을 전달하였고, 점심을 먹으러 나왔던 회사원들은 그 자리에서 가두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남대문 시장 상인들도 성당에서 농성하고 있던 학생들에게 옷을 보냈다.
<명동성당 농성투쟁 지지편지>
⊙ 민주발전을 위해 써 주십시오. 고등학생이라 아무 것도 드릴게 없어요. 지갑을 털어 작은 정성을 보냅니다.
⊙ 시대의 아픔과 고뇌를 함께 하는 데서 항상 여러분에게 못 미쳤던 평범한 샐러리맨 69명과 식당 주인 아저씨로부터
⊙ 나의 형제 자매들에게. 몸은 함께 하지 못하나 마음만은 당신들과 함께 합니다. 당신과 같이 피를 흘리지 못하나 눈물만은 함께 흘립니다. 당신들을 사랑합니다. 나는 자신있게 대답합니다. 당신들은 진정 우리의 '희망'이라고.
⊙ 장한 일 하십니다. 힘과 용기를 가지십시오. 시민 일동
⊙ 사랑하는 학생들에게.
학생들의 애국적인 투쟁에 따른 희생을 모르는 척 하고 눈을 돌리고 있다는 것이 몹시 부끄럽고 죄를 짓고 있는 것 같은 괴로움이 자꾸 치밀어 올라와 어느 모퉁이에서 간절히 동참하고 있는 마음 약한 40대 중반의 못난 선배를 용서하십시오. 그러나 부탁이 있소. 폭력은 금물이오. 국민들이 원하지 않기 때문이오. 또 법의 가면을 쓴 폭력이 정당화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오. 정부당국의 발표를 보면 80년 5.17때의 섬뜩한 생각이 들기도 하오. 이번만은 절대로 그러한 우를 범해서 반역자들에게 빌미를 주지 맙시다. 말없이 지켜보는 많은 국민은 애국적인 학생들을 지지하고 있음을 확신합니다. 부디 건강을 비오.
이렇게 명동 성당에서의 농성 투쟁이 6월 민주화 운동의 불길을 이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국민운동본부는 6월 18일 최루탄 추방대회를 개최한데 이어서 군대 동원의 가능성에 대한 정부의 경고에도 굽히지 않고 6월 26일 [국민평화 대행진]이라는 조직된 시위를 주도하여 1백만의 참여를 이끌어냈다. 이런 국민들의 거대한 힘에 놀란 정권은 '직선제 개헌' 및 광범한 민주화 조치 등을 보장하는 [국민화합과 위대한 국가로의 전진을 위한 특별선언(일명 '6.29선언')을 내놓게 된다. 우리 국민이 거둔 또 하나의 승리였다.
"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오늘 저는 각계 각층이 서로 사랑하고 화합하여 이 나라의 국민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정부 역시 국민들로부터 슬기와 용기와 진정한 힘을 얻을 수 있는 위대한 조국을 건설하기 위해 비장한 각오로 역사와 국민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6.29선언 중)
② 정수라의 <아, 대한민국 >
1980년대 초반 가수들은 앨범을 낼 때마다 앨범 마지막에 건전가요를 한곡씩 의무적으로 실어야만 했다. 5공화국이 '사회 정화 업무의 효율적 수행'을 위해 정부 차원에서 제도적으로 강요한, 어느 나라에도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관제였다. 이른바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자는 뜻이었다. 이를 관할하는 곳이 이른바 사회정화위원회라는 데였다. 이 위원회는 1983년 '국민들에게 주인의식을 고취시키자'는 사뭇 거창한 의도하에 한국방송공사와 함께 건전가요만으로 옴니버스앨범을 제작키로했다. 박건호씨등 중견 작사, 작곡가들이 곡을 만들고 가수도 직접 추천하는 등 앨범 제작 실무를 맡았다.
<아, 대한민국 >은 이 과정에서 태어났다. 정부에서는 이 노래를 조용필이나 민해경이 부르기를 원했다. 이왕이면 톱스타가 부르는게 홍보 효과가 크지 않겠느냐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박건호씨는 정수라를 택했다.
< 아! 대한민국 > (박건호 작사/ 김재일 작곡 1983)
하늘엔 조각구름 떠있고 강물엔 유람선이 떠있고
저마다 누려야할 행복이 언제나 자유로운 곳
뚜렷한 사계절이 있기에 볼수록 정이 드는 산과 들
우리의 마음 속의 이상이 끝없이 펼쳐지는 곳
*원하는 것은 무엇이건 얻을 수 있고
뜻하는 것은 무엇인건 될수가 있어
이렇게 우린 은혜로운 이 땅을 위해
이렇게 우린 이 강산을 노래 부르네
아 - 우리 대한민국 아 - 우리 조국
아 - 영원토록 사랑하리라.
도시엔 우뚝 솟은 빌딩들 농촌엔 기름진 논과 밭
저마다 자유로움 속에서 조화를 이뤄가는 곳
도시는 농촌으로 향하고 농촌은 도시로 이어져
우리의 모든 꿈은 끝없이 세계로 뻗어가는 곳
그러나 이 노래는 처음에는 별 신통한 반응이 없었다. 한달쯤 지나자 반응은 운동장에서 왔다. 응원가로 폭발적인 인기를 모으기 시작한 것이었다. 건전가요라는 비인기종목(?)의 핸티캡을 벗어던지고 <아, 대한민국 >은 그해 정수라에게 'MBC 10대 가수 신인상'을 안겨 줬으며 40만장의 앨범이 팔려나가는 진기록을 남겼다. 1983년 만들어진 이 노래는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면서 온 국민의 감정을 하나로 승화시켰다. 이른바 '관제 노래'임에도 <아, 대한민국 >이 이처럼 히트를 하게 된 것은 상당 부분 당시 사회 분위기 덕이기도 했다. 5공 독재가 무르익던 1983년, 1984년 무렵엔 KAL기 피격사건, 버마 아웅산 폭파사건, 북한의 남침땅굴 발견 등 메가톤급 공안 사건들이 연거푸 터지면서 국민들에겐 어느때보다 반공의식이 고조되었다. 이런 와중에 <아, 대한민국 >의 탄생은 불안한 국민감정을 하나로 묶는데 안성마춤이었다. 그리고 방송사에서도 정책적으로 이 노래를 꾸준히 내보냈다.
*비교 ① < 아, 대한민국 > ( 1990.4 정태춘 작사·작곡 )
우린 여기 함께 살고있지 않나 / 사랑과 순결이 넘쳐흐르는 이 땅
새악시 하나 얻지 못해 농약을 마시는 / 참담한 농촌의 총각들은 말고
특급 호텔 로비에 득시글거리는 / 매*춘 관광의 호사한 창*녀들과 함께
우린 모두 행복하게 살고 있지 않나 / 우린 모두 행복하게 살고 있지 않나
아, 우리의 땅, 아, 우리의 나라....
우린 여기 함께 살고 있지 않나 / 기름진 음식과 술이 넘치는 이 땅
최저임금도 받지 못해 싸우다가 쫓겨난 / 힘없는 공순이들은 말고
하룻밤 향락의 화대로 일천만원씩이나 뿌려대는
저 재벌의 아들과 함께 / 우린 모두 풍요롭게 살고 있지 않나
우린 모두 만족하게 살고 있지 않나
아, 대한민국, 아, 우리의 공화국
우린 여기 함께 살고 있지 않나 / 저들의 염려와 살뜰한 보살핌 아래
벌건 대낮에도 강도들에게 / 잔인하게 유린 당하는 정숙한 여자들은 말고
닭장차에 방패와 쇠몽둥이를 싣고 신출귀몰하는 우리의 백골단과 함께
우린 모두 안전하게 살고 있지 않나 / 우린 모두 평화롭게 살고있지 않나
아, 우리의 땅, 아, 우리의 나라....
우린 여기 함께 살고 있지 않나 / 양심과 정의가 넘쳐 흐르는 이 땅
식민독재와 맞서 싸우다 / 감옥에 갔거나 어디론가 사라져간 사람들은 말고
하루 아침에 위대한 배신의 칼을 휘두르는 / 저 민주인사와 함께
우린 너무 착하게 살고 있지 않나 / 우린 바보같이 살고 있지 않나
아, 대한민국, 아, 우리의 공화국
우린 여기 함께 살고 있지 않나 /거짓 민주, 자유의 구호가 넘쳐흐르는 이 땅
고단한 민중의 역사 / 허리 잘려 찢겨진 상처로 아직도 우는데
군림하는 자들의 배 부른 노래와 피의 채찍 아래
마른 무릎을 꺽고 / 우린 너무도 질기게 참고 살아왔지
우린 너무 오래 참고 살아왔어
아, 대한민국, 아, 저들의 공화국!
아, 대한민국, 아, 대한민국......
*비교② < 아름다운 강산> ( 신중현 작사/ 작곡 )
하늘은 파랗게 구름은 하얗게 실바람도 불어와 부푸는 내마음
나뭇잎 푸르게 강물도 푸르게 아름다운 이곳에 네가 있고 내가 있네
손잡고 가보자 달려보자 저 광야로
우리들 모여서 말해보자 새희망을
하늘은 파랗게 구름은 하얗게 실바람도 불어와 부푸는 내마음
우리는 이땅위에 우리는 태어나고 아름다운 이곳에 자랑스런 이곳에 살리라
찬란하게 빛나는 붉은 태양이 비추고 하얀 물결 넘치는 저바다와 함께있네
그 얼마나 좋은가 우리 사는 이곳에 사랑하는 그대와 노래하리
오늘도 너를 만나러 가야지 말해야지 먼 훗날에 너와 나 살고 지고
영원한 이곳에 우리의 새꿈을 만들어 보고파
봄 여름이 지나면 가을 겨울이 온다네
아름다운 강산 너의 마음 나의 마음 나의 마음 너의 마음
너와 나는 한마음 너와 나
우리 영원히 영원히 사랑 영원히 영원히
우리 모두다 모두다 끝없이 다정해.
( 1973년 청와대로부터 신중현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대통령을 위한 노래를 만들어 달라는 전화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젊은 혈기의 신중현은 세상돌아가는 판세와는 무관하게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5분 뒤 공화당에서 전화가 또 걸려 왔다. 역시 같은 내용의 전화였다. 정치에 대해서 전혀 아는 바가 없다는 이유를 들어 상대의 끈질긴 설득을 물리쳤다. 그런 일이 있고 2개월 뒤 신중현은 <아름다운 강산>을 발표했다. 한 사람의 대통령을 위한 노래보다 이왕이면 온 국민이 즐겨 부를 수 있는 노래를 만들자는 의도에서였다. )
③ < 불씨 > (한돌 작사·작곡 신형원 노래 1982)
그 누가 나를 / 사랑한다고 해도
이젠 사랑의 불꽃 / 태울 수 없네
슬픈 내 사랑 / 바람에 흩날리더니
뜨거운 눈물 속으로 / 사라져버렸네
텅빈 내 가슴에 / 재만 남았네
불씨야 불씨야 / 다시 피어라.
* 이 노래는 5공 초기 젊은이들의 좌절감과 패배감을 노래하고 있다. '불씨'는 야망과 정열과 투쟁과 항쟁의 상징이다. 그러나 그 불꽃은 타오르지 못했다. 그러나 비록 자기변명, 자기 정당화에 불과할지는 모르지만 언젠가는 두고 보자는 최소한의 자존심, 바로 불씨는 살아있다는 사실을 끝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불꽃은 꺼져버렸지만 또 타오를 수 있는 불씨만큼은 가슴 속에 살아있기에 '절대적인 힘'에 부딪쳐 물러나도 권토중래를 기약한다는 자기 위안의 의미는 충분히 가지고 있었기에 대학가에서 폭발적인 반향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
<읽기자료2> 대통령 바이러스 인터넷 강타!
(조선일보에서 발췌 인용)
1. 이승만 바이러스
파일들이 자꾸 하나로 합쳐진다. 합쳐진 파일을 실행시키면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습네다]라는 노인의 목소리가 나온 후 하드 디스크가 저절로 조각조각 분열된다.
2. 박정희 바이러스
매년 5월 16일이 되면 활동을 하는 아주 질긴 바이러스다. 활동을 시작함과 동시에 총소리와 군화 발자국 소리가 나며 간간이 [그때 그 사람]이란 노래 가락이 흘러 나온다. 김재규 백신을 쓰면 100% 치료가 가능하다.
3. 최규하 바이러스
바이러스 중에서 가장 용량이 크다. 하드 디스크 내의 파일을 다 잡아먹고 화면에 오리발을 출력하는 것이 대표적인 증상. 바이러스를 구성하고 있는 파일의 맨 끝 부분을 들여다 보면 [묵묵부답]이라는 단어가 있다.
4. YS 바이러스
루트 디렉토리에 [BLUE - HOUSE]라는 디렉토리를 만든다. 만약 이 디렉토리를 건드리면 화면에 칼국수 면발이 가득 차면서 모든 문서 파일의 글들이 경상도 사투리로 바뀐다.
5. 노태우 바이러스
백신프로그램을 가장한 바이러스다. "나는 보통 백신"이라고 자랑하고 다니면서 무려 5천메가의 파일을 지워버린다. 비자금 파일을 들여다 보면 [믿어 주세요]라는 단어가 보인다.
6. 전두환 바이러스
박정희 바이러스 이후 등장한 가장 강력한 바이러스다. 12월 12일이 되면 "하나회. EXE"파일을 만들어 CPU를 장악해버린다. 5월 18일이 되면 CPU를 정상화시키려는 파일들을 무차별 삭제한다. 이 바이러스는 활동할 때마다 [왜 자꾸 나만 갖고 그래?]라는 볼멘 소리의 메세지가 나온 후 사과 박스가 화면에 가득 찬다. 그래픽 보기 유틸리티로 불러들여 보면 박스안에 현금이 가득하다.
7. 최불암 바이러스
다른 바이러스와는 달리 반찬값을 절약해 주는 양성 바이러스. 감염되면 오히려 이득을 볼 수 있다. 컴퓨터 본체에서 갑자기 흙이 떨어지는 증상이 가장 대표적. 이때 당황하지 말고 컴퓨터 케이스를 열어보면 저녁 찬거리에 좋은 신선한 [파]가 가득 차 있음을 볼 수 있다.
출처: baboljm78(발췌:네이버 지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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