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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조선] '한·일 해저터널'
일본쪽 시발점을 가다
'지원군' 하토야마號 출범…
한·일터널 본격 닻 올리나
<이 기사는 주간조선 2074호에
게재되었습니다.>
일본 규슈 최대 도시 후쿠오카(福岡)에서 서쪽으로 1시간30분가량 떨어진 사가(佐賀)현 가라쓰(唐津)시. 우리나라의 충남 당진(唐津)과 똑같은 한자 이름을 가진 인구 13만명의 작은 도시다. 가라쓰 시내에서 꼬불꼬불한 왕복 2차선 도로를 타고 시내 북쪽 산중턱으로 15분 정도 올라가자 어두컴컴한 터널이 입을 벌리고 방문객들을 맞이한다. 자동차 2대가 겨우 지나다닐 만한 폭 5.4m, 높이 5m의 터널 입구 주위에는 포크레인과 발전기를 비롯해 터널 굴착에 필요한 각종 중장비들이 어수선하게 널려있다.
중장비 주위에는 시공하고 남은 듯한 철근과 시멘트, 자갈 등의 건자재도 곳곳에 어지럽다. 터널 입구와 주변의 조립식 건물에는 ‘안전제일’ ‘정리정돈’ ‘진입금지’ 등 한자로 적힌 공사 경고문들도 이곳 저곳에 붙어있다. 터널 입구 위에는 일본어와 한글로 동시에 표기한 ‘한·일터널 나고야(名護屋) 조사사갱(터널)’이란 입간판이 붙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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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 규슈 사가현 가라쓰시의 한·일 해저 조사터널. 터널 안에서 입구를 향해 바라본 모습 / photo 이동훈
일본 민주당의 역사적인 정권교체와 함께 한·일 해저터널이 새삼 주목받고 있다. 중의원발 선거혁명으로 자민당의 이른바 ‘55년 체제’가 무너지면서 한국과 중국과의 관계를 중시하는 하토야마 신 내각이 지난 9월 16일 출범했기 때문이다.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신임 총리는 집권 전부터 ‘우애(友愛)’에 기반한 동아시아 공동체 형성을 줄곧 강조해 온 정치인이다. 또 지난해 초에는 한·일 해저터널 추진을 위한 초당파 의원연맹에 민주당 간사장 자격으로 참여한 적도 있다. 때문에 “한·일 관계뿐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의 역학구도에 일대 변화를 가져올 것으로 예상되는 한·일 해저터널 건설이 탄력을 받을 것”이란 관측도 조심스럽게 나온다.
물론 현재까지는 한·일 양국 수뇌부 사이에 해저터널에 관한 원론적인 언급만 나왔을 뿐 아무것도 결정된 바가 없다. 하지만 한국과 일본 양국의 해저터널 프로젝트 관계자들은 “한·일 해저터널은 언젠가는 반드시 뚫리게 된다. 시간문제일 뿐”이라는 데 별다른 이견이 없다. 환경부 장관과 수자원공사 사장을 지내고 현재 한·일 해저터널 한국 측 자문위원을 맡고 있는 곽결호(63) 한양대 건설환경시스템공학과 석좌교수는 “한한·일 해저터널 프로젝트는 향후 건설적이고 미래지향적인 한·일 관계 정립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사업”이라고 강조했다.
규슈 가라쓰
터널 570m 뚫고 수십 년 지질조사 "기술적 문제 없다"
임진왜란 때 출병지… 한국인 거부감 우려
어두운 터널 속으로 약 60m쯤 걸어 들어갔다. 무덥고 습한 바깥 날씨에도 불구하고 지하 깊은 곳의 서늘한 기운이 온몸을 감싸고 돈다. 한·일 해저터널의 일본 측 입구로 유력한 사가현 가라쓰 일대의 지질을 조사하기 위한 조사터널(파일럿 터널)에 불과하지만 콘크리트를 사용해 벽면을 두껍고 말끔하게 마감해 놓았다. 길이만 570m에 달한다는 터널의 입구 오른쪽으로는 한 갈래의 협궤 철로도 깔려있다. 작업인부들과 중장비들을 터널 아래로 실어 보내고, 지하에서 캐낸 암석과 흙을 퍼내오는 용도로 쓰이는 철로다. 철도 주위에는 각종 전선과 함께 ‘궤도주의’라는 빨간색 표어도 곳곳에 붙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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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저터널이 지나게 될 가카라시마(사진 왼쪽 섬)와 가베시마(오른쪽). 아래는 일본 측 해저터널의 시발점 가라쓰시.
터널 위 천장에는 약 1m 간격으로 형광등이 촘촘히 설치돼 있어 그리 어둡지는 않다. 하지만 푸르스름한 형광등 불빛 너머로 군데군데 푸른색의 이끼와 거미줄을 친 흔적이 보인다. 터널 천장으로는 바깥 공기를 터널 제일 깊숙한 곳까지 불어넣는 송풍구도 지나간다. 지난 28년간 이곳 한·일 조사터널 현장을 지켜왔다는 후지하시 겐지(藤橋健次) 현장소장은 “한·일 해저 조사터널은 1986년부터 터널을 파기 시작해서 현재 570m 길이까지 파고 들어갔다”며 “수십 년간의 지질조사 결과 한·일 해저터널을 굴착하는 데는 기술적으로 전혀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터널 입구의 현장사무소에 마련된 모두 4개의 CCTV 화면을 통해 터널 속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는 것도 후지하시 소장의 일이다.
후지하시 소장이 걱정하는 것은 기술적 문제가 아닌 역사적 문제다. 공교롭게도 한·일 해저터널의 일본 측 입구이자 출구가 될 것으로 보이는 가라쓰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도발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한반도로 출병했던 곳이기 때문이다. 조사터널과 차로 5분가량 떨어진 곳에는 두 차례의 전쟁 동안 왜군이 지휘본부로 사용했다는 나고야 성터도 보인다. 나고야 성터를 관리하는 히가시 나카가와(東中川 忠美) 나고야성 박물관장은 “가라쓰 나고야성은 전쟁 발발 1년 전인 1591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심복인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등에게 명해 5개월 만에 급조한 성곽”이라며 “전쟁을 앞두고 20만의 병력과 군수물자들이 나고야성 주위에 총집결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한다. 지금은 성벽의 일부와 주춧돌만 어지럽게 남아서 세월의 흔적을 말해주고 있다.
한때 성의 지휘소가 있었다는 곳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현해탄(玄海灘)을 바라봤다는 사실을 새긴 성인 키보다 큰 돌 비석이 서있다. 도요토미는 이곳에서 현해탄을 아래로 내려다보며 한반도(조선)와 중국(명), 멀게는 인도까지 정복할 꿈을 꿨다고 전해진다. 성 주변으로 둘레가 130㎞에 이르는 진지 안에는 20여만명에 달하는 도요토미의 휘하 부대가 구름처럼 진을 치고 공격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시커먼 현해탄 위에는 가베시마(加部島), 가카라시마(加唐島), 이키(壹岐島), 쓰시마(對馬島) 등의 섬이 마치 징검다리처럼 놓여있다. 가라쓰와 가베시마 사이에는 요부코(呼子) 대교라는 연륙교도 이미 놓여져 있다. 마침 화창한 날씨 덕분에 이곳에서 100㎞ 넘게 떨어져 있는 쓰시마의 윤곽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쓰시마 너머로는 한반도가 한눈에 들어올 듯하다.
한·일 해저터널
한국 동남권(부산·경남)과 일본 규슈 사이 대한해협 아래를 통과하는 해저터널이다. 최초 구상은 일제강점기인 1938년 일본 측에서 만든 ‘조선해협 철도터널 계획’에서 비롯됐다. 일제의 패망과 함께 잠시 중단됐던 해저터널 논의는 1980년대부터 다시 공론화되기 시작했다. 현재 일본 규슈 사가현 가라쓰시에는 해저지질조사를 위한 길이 570m의 조사터널이 굴착돼 있는 상태다. <주간조선 2043호 ‘한·일 해저터널’ 기사 참조>
쓰시마
중간 기착지… 한국인 많이 찾는 일본 속 한국
"완공 땐 사실상 부산경제권에 편입될 것"
다음날 오전 후쿠오카 시내에서 10분가량 떨어진 하카다(博多)항 여객터미널. 후쿠오카 시내로 오목하게 파고든 하카다(博多)만을 품고 있는 국제 여객선 터미널이다. 부산을 비롯해 쓰시마, 이키 등 도서지역으로 들어오고 나가는 배가 쉴새 없이 드나드는 곳이기도 하다. 흔히 대마도(對馬島)라고 부르는 쓰시마는 이곳에서 쾌속선으로 2시간가량 떨어져 있다.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이키를 경유해 쓰시마로 향하는 정원 263명의 쾌속선은 1, 2층 모두 관광객과 현지 주민들로 만석을 이루었다. 승객들을 가득 태운 쾌속선이 하카다만 입구를 빠른 속도로 벗어나자 쓰시마와 후쿠오카 사이에 놓인 시커먼 현해탄이 눈앞에 펼쳐진다.
쓰시마와 이키는 지리적으로 한·일 양국의 가운데에 있어 한·일 해저터널의 중간 기착점으로 유력하게 거론되는 곳이다. 부산이나 거제에서 시작되는 해저터널은 1차로 쓰시마를 거쳐 이키로 상륙한 다음 일본 본토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쓰시마와 이키에는 각각 휴게소와 함께 터널의 환풍구 등이 들어설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노선은 과거 조선통신사가 조선과 일본을 왕래한 길이기도 하다. 부산 동의대 일어일문학과의 한기승(韓基昇·60) 교수는 “한·일 해저터널 노선은 과거 조선통신사가 일본을 방문했던 노선과 거의 일치한다”며 “조선통신사가 한·일 양국 간 260년간의 평화를 가져왔듯이 한·일 해저터널도 양국 간 우호선린관계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쾌속선은 궂은 날씨와 현해탄의 거친 파도를 헤치며 서북쪽을 향해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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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일 해저 조사터널 입구.
2시간가량 현해탄을 가로지른 쾌속선은 쓰시마 동남쪽 이즈하라(嚴原)항에 도착했다. 국제여객선터미널이 자리잡고 있는 이즈하라 항구는 인구 3만명이 채 안되는 쓰시마에서 가장 번성한 지역이다. 섬 가운데의 운하를 기준으로 상도(上島)와 하도(下島) 2개의 섬으로 나뉘어진 쓰시마에서 주요 시설은 거의 하도에 집중돼 있다. 제주도 면적의 40% 정도에 불과한 쓰시마는 어업을 제외한 살림살이를 거의 전적으로 한국에 의존하고 있다. 이즈하라 항 근처 골목길 어귀에는 한국 사람들이 주로 찾는다는 허름한 호텔과 식당, 술집 등이 빼곡하다.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가라오케도 곳곳에 있고, ‘한국인 출입금지’라는 종이가 붙은 술집도 간혹 눈에 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태평양전쟁 때 원자폭탄이 떨어진 규슈 나가사키(長崎)현에 속해있지만 섬 곳곳에서는 일본말보다 거친 부산 사투리가 더 자주 들려온다.
때문에 일본인들 사이에서는 “한·일 해저터널이 뚫리면 쓰시마를 한국에 완전히 빼앗길 것”이란 목소리도 나온다. 일본 해군의 전략적 요충지인 쓰시마가 일본에 가지는 의미는 남다르다. 과거 러일전쟁을 앞둔 일본 해군은 군함의 작전능력을 강화하기 위해 1901년 쓰시마를 동서로 관통하는 길이 500m의 운하를 뚫었다. 군함들이 매복하기에는 더없이 좋다. 쓰시마 운하 덕분인지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 제독이 지휘하는 일본 연합함대는 ‘정(丁)’자 진법으로 러시아 발틱함대를 쓰시마 앞바다에서 1차로 격침시키고 독도까지 추격해 모조리 수장(水葬)시켰다. 도고 헤이하치로는 ‘일본의 이순신’에 비견되는 러일전쟁의 영웅이다. 동서로 비스듬히 가로지르는 쓰시마 운하에는 만제키바시(万關橋)라는 철제 트러스 다리가 남북으로 가로지르고 있다. 쓰시마 상도와 쓰시마 하도를 연결시켜주는 유일한 다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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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러일전쟁을 앞두고 굴착된 쓰시마 운하.
노선이 문제
험준한 산악지형인 쓰시마 관통이 걸림돌
한국 측 공사구간은 전체의 10분의 1 불과
한·일 해저터널 역시 쓰시마 상도와 쓰시마 하도를 통과해 건설되는 방안이 유력하다. 부산이나 거제에서 시작한 터널이 쓰시마 상도로 올라온 다음 쓰시마 하도와 이키를 거쳐 일본 본토로 들어가는 방안이다. 현재 거론되는 유력한 3개 노선 제안(案) 가운데 2개 노선이 쓰시마 상도와 쓰시마 하도를 동시에 통과하는 방안이다. 나머지 1개 방안은 거제도 동쪽 해안에서 출발해 쓰시마 하도만을 거쳐 곧바로 이키와 일본 본토로 연결되는 것이다. 하지만 쓰시마 전체 면적의 80%를 차지하고 있는 삼림과 산악지형을 헤치고 철도나 도로를 놓는 것 역시 쉬운 문제가 아니다. 척박한 산악지형의 쓰시마에는 이미 섬 곳곳에 수십 개가 넘는 터널이 뚫려있을 정도로 지형이 험준하고 교통이 불편했다.
하지만 쓰시마 관통문제는 엄밀히 말해 우리나라의 소관이 아니다. 한·일 해저터널 공사가 실제로 착수될 경우 행정구역상 규슈 나가사키현에 속해 있는 쓰시마 육상구간 공사는 일본 측에서 담당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부산이나 거제에서 쓰시마까지 이어지는 49.5㎞의 해저구간 공사의 절반만을 담당할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에서 한·일 해저터널 프로젝트 공론화 작업을 하고 있는 평화통일재단의 고부안 사무차장은 “전체 길이만 200㎞가 넘는 한·일 해저터널 프로젝트에서 우리가 담당하게 될 부분은 사실 전체의 10분의 1가량인 25㎞ 정도”라며 “만약 해저터널이 연결될 경우 쓰시마는 부산의 동남 경제권으로 완전히 편입되는 등 우리로서는 전혀 손해볼 것이 없는 프로젝트”라고 강조했다.
일본 측 조사터널 현장소장 후지하시 겐지
"가라쓰에 대한 한국측 거부감 크면 시발점 변경 검토"
후지하시 겐지(藤橋健次·60) 소장은 26년 전인 1983년부터 일본 측 가라쓰 지질조사 현장소장을 맡고 있는 인물이다. 현재 일·한터널협회 상임이사를 맡고 있기도 하다.
과거 구마가야구미(熊谷組) 건설사의 토목부문에서 근무한 경력을 살려 일본 세이칸(靑函) 해저터널 팀과 더불어 육상부분 지질조사와 해저부 지질조사 등을 총괄하고 있다. 지난 9월 11일 가라쓰 한·일 해저 조사터널 현장과 이날 오후 후쿠오카에서 열린 한·일터널 세미나에서 후지하시 소장을 만나 한·일 해저터널에 관한 그의 견해를 들어봤다.
“해저 조사터널은 1986년 10월에 착공에 들어가 1989년 4월 400m 지점까지 파내려 들어갔습니다. 현재 가라쓰의 나고야만(灣) 해저 아래 570m까지 파내려가 있는 상태입니다. 지질조사 목적은 어느 정도 달성했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더 파내려가지 않고 있지요. 향후 본 터널 공사가 시작되면 현재의 조사터널은 본 터널과 이어져 공사 중 발생하는 지하수와 바닷물 등을 밖으로 뽑아낼 터널로 사용될 예정입니다.”
후지하시 소장과 지금까지 연구된 자료에 따르면 한·일 해저터널의 가장 유력한 노선은 이곳 규슈 사가현 가라쓰에서 시작해 ‘부산~거제도~쓰시마 상도~쓰시마 하도~이키~가카라시마~가베시마~가라쓰’로 이어지는 노선(B안)이다.
하지만 일각에서 제기되는 경제적 타당성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부산~후쿠오카를 바로 연결하는 직통 노선으로 변경될 수도 있다고 한다. 직통노선이 연결될 경우 교통 및 화물 수요를 충분히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일 해저터널이 실제 건설될 경우 최대 수혜자가 될 것으로 보이는 부산과 후쿠오카도 두 도시의 직접 연결을 선호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금까지는 공사비가 많이 드는 해저구간을 최대한 짧게 하기 위해 가라쓰~쓰시마~거제 노선을 줄곧 생각해 왔습니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육로공사비와 해저공사비 간에 거의 차이가 없어졌습니다. 오히려 가라쓰 노선의 경우 과거 임진왜란 때 일본군의 출병지라는 한·일 간 역사문제로 인해 거부감을 주는 측면이 있습니다. 때문에 후쿠오카 ‘이토시마 반도(?島半島)’를 새로운 시발점으로 삼아 터널을 파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습니다.”
후지하시 소장의 말대로 후쿠오카의 서쪽 해안가에 있는 이토시마 반도로 터널의 입출구가 정해지면 기존의 철도나 도로와 한·일 해저터널을 연결시키는 것이 보다 쉬워진다.
후지하시 소장은 일부에서 제기되는 “해저터널이 해저단층을 건드려 지진해일(쓰나미) 사태가 발생할 것”이란 우려에 대해서는 명확히 선을 그었다. 부산에서 거제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쓰시마 상도로 이어지는 노선의 경우 바다 밑 대한해협 단층대를 통과해야 하기 때문에 “영화 ‘해운대’와 같은 대재앙이 발생할 것”이란 우려가 줄곧 있어왔다.
“우리가 10년 동안 지질조사를 벌인 결과 부산과 쓰시마 사이를 가로지르는 단층이 활단층(계속 활동 중인 단층)이란 것은 증명된 바 없습니다. 더욱이 지진계를 곳곳에 설치해 연구를 해본 결과 한·일 해저터널이 지진을 유발할 가능성은 없는 것으로 나옵니다.”
후지하시 겐지 소장은 앞으로 한·일 해저터널을 실제 뚫기 위해서는 한·일 양국 정부는 물론 양국 국민들도 해저터널에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영국과 프랑스를 잇는 영·불 해저터널(유로터널)도 최초 구상부터 실제 터널을 뚫기까지 200년이란 세월이 걸렸습니다. 개인의 명예나 단체의 이익을 위해서 이 프로젝트를 추진하면 절대 불가능합니다. 나는 한·일 해저터널 프로젝트에 무엇에 홀린 것처럼 사재(私財)도 5억엔 가량이나 털어넣었습니다. 동북아 전체의 이익을 두고 한·일 양국이 서로 합심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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