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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 라이벌, 칼 루이스와
벤 존슨
서울올림픽이 한창이던 지난 1988년 9월 27일 이른 아침. 조선일보를 받아본 독자들은 경악했다. 1면 톱기사 제목은 ‘벤 존슨 약물 복용’. 남자 100m 결승에서 9초79의 세계신기록으로 우승한 벤 존슨(캐나다)이 약물 복용으로 금메달을 박탈당하게 됐다는 사실을 단독 보도한 것이다. 이 기사는 외신을 통해 전세계에 긴급 타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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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에서 가장 빠른 사나이가 될 뻔 했던 벤존슨과 그의 경쟁자들. 오른쪽부터 칼루이스, 린퍼드 크리스티, 캘빈 스미스 / 조선일보 DB
◆ 벤 존슨 대 칼 루이스, 20세기 육상 최대 빅 매치
1988년 당시 칼 루이스는 직전 대회인 LA올림픽에서 4관왕을 차지한 당대 최고의 육상스타. 그러나 전 대회 동메달에 그쳤던 벤 존슨이 무섭게 성장해 1986~1987년 사이 칼 루이스에게 5연속 패배를 안겼다. 벤 존슨은 87년 로마세계선수권대회에서는 9초83의 세계신기록을 세웠다.
칼 루이스는 빼앗긴 권좌를 되찾기 위해 절치부심했다.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LA올림픽 100m 금메달을 아버지 곁에 묻었다. ‘금메달은 또 따면 된다’고 각오를 새롭게 한 것. 언론에서는 연일 “20세기 육상 최대 빅 매치”라며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1988년 9월 24일 오후 1시 30분. 잠실 올림픽 주경기장은 7만 5000여 관중으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세계인의 시선이 3번 레인의 칼 루이스와 6번 레인의 벤 존슨에게 모였다.
“제자리에, 차려, 탕!” 관중들의 엄청난 환호성과 플래시 세례를 뒤로 하고 ‘용수철 스타트’라 불렸던 벤 존슨이 가장 먼저 스타팅 블록을 박차고 나왔다. 20m부터 기선을 제압한 벤 존슨은 계속 치고 나갔다. 50m에서 칼 루이스가 1~2m 간격으로 추격했지만 이후 격차는 더 벌어졌다. 본래 60m 이후 스퍼트가 장기였던 칼 루이스는 당황한 듯 앞서나가는 벤 존슨을 힐끔힐끔 쳐다봤다. 결승선을 통과하기 직전 벤 존슨은 왼쪽의 칼 루이스를 돌아보고는 오른팔을 하늘로 쭉 뻗으며 승리를 만끽했다. 9초79. 경이적인 세계신기록이었다.
이어 9초92로 결승선을 통과한 루이스는 포효하고 있는 벤 존슨에게 다가가 축하의 악수를 건넸다. 벤 존슨이 캐나다 국기를 흔들며 트랙을 돌고 있는 동안 칼 루이스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전광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 세계를 뒤흔든 약물 스캔들
‘서울의 신화, 올림픽 역사 불멸의 대기록’, ‘배고파 시작한 달리기, 형에게 질 때마다 울었다’, ‘자메이카에서 캐나다로 이민, 역경 딛고 성공’. 국내외 신문에 대서특필된 벤 존슨의 금메달 획득 스토리였다. 세계는 벤 존슨에 열광했다. 벤 존슨의 드라마틱한 삶도 주목할 만했지만 “과묵하고 성실한 벤 존슨이 말 많은 칼 루이스를 꺾어 기쁘다”는 한 외신기자의 말처럼 칼 루이스는 미운털이 박혀 있었다.
사흘 후인 9월 27일 아침. 벤 전슨에게 열광했던 전 세계가 이번에는 크게 탄식했다. 벤 존슨이 금지약물인 아나볼릭 스테로이드(근육형성촉진제)를 복용한 혐의로 금메달과 기록을 박탈당한 것. 신문 제목은 ‘전세계의 비극’, ‘상업주의가 전세계 우롱’, ‘캐나다 국민들도 분노’ 등으로 바뀌었다. 벤 존슨이 어머니와 함께 황급히 김포공항을 빠져나가는 모습이 종일 뉴스를 장식했다.
칼 루이스는 전년도 로마세계육상선수권대회에서 벤 존슨이 세계신기록을 세우며 우승하자 그의 약물복용설을 제기해 ‘비겁한 떠벌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이 의혹이 사실로 드러나자 칼 루이스는 명예회복에 성공했다. 칼 루이스는 기자회견에서 “존슨이 충격을 딛고 재기해 다시 멋진 경쟁을 할 수 있게 되길 바란다”고 덕담을 건넸다. 세상은 다시 칼 루이스를 주목했다.
◆ 세기의 대결 이후
칼 루이스는 1991년 도쿄 세계선수권대회 100m에서 9초86의 세계신기록을 세우며 우승해 절정의 기량을 과시했다. 이후 100m 선수로는 쇠락의 길을 걸었지만 올림픽 멀리뛰기 4연패, 총 9개의 금메달을 따내며 육상의 살아있는 전설이 됐다.
1996년 애틀란타 올림픽을 2개월 앞두고 100m 라이벌이었던 동료 육상스타 르로이 버렐과 동성애 연인 관계라는 설이 제기돼 팬들을 충격에 빠뜨리기도 했다. 1997년 현역에서 은퇴한 후 그는 영화배우 및 자선사업가로 활동했다. 현재는 2010년 개봉을 앞둔 보석강도 영화 ‘62 픽업’에 조연으로 출연하고 있다. ‘칼루이스 재단’을 만들어 육상 꿈나무들도 후원한다.
벤 존슨은 약물 사건 3년 후 다시 트랙으로 돌아왔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100m에 출전했지만 준결승에서 탈락하자 다시 약물에 손댔다. 1993년 2월 캐나다 몬트리올 육상대회에 출전했다가 남성호르몬 테스토스테론을 복용한 사실이 드러나 영구 자격정지 처분을 받았다.
이후 아르헨티나의 축구영웅 디에고 마라도나, 카다피 리비아 최고지도자의 셋째 아들 알 사디 카다피의 개인 트레이너로 일했다. 2003년에 카다피가 이탈리아 프로축구 페루자팀에 진출하자 팀의 트레이너로 고용됐다. 그러나 카다피가 데뷔 첫 경기를 마치자마자 약물을 복용한 사실이 드러나 “그 스승에 그 제자”라는 비판을 받았다.
벤 존슨은 이후 종종 방송에 출연해 “서울올림픽 도핑테스트 당시 소변이 잘 안 나와 칼 루이스의 친구가 건넨 맥주를 마신 게 문제였다”며 “약물 파동은 칼 루이스의 음모”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현재는 독일 등지에서 육상선수들을 육성하는 지도자로 활동 중이다.
1988년 당시 칼 루이스는 직전 대회인 LA올림픽에서 4관왕을 차지한 당대 최고의 육상스타. 그러나 전 대회 동메달에 그쳤던 벤 존슨이 무섭게 성장해 1986~1987년 사이 칼 루이스에게 5연속 패배를 안겼다. 벤 존슨은 87년 로마세계선수권대회에서는 9초83의 세계신기록을 세웠다.
칼 루이스는 빼앗긴 권좌를 되찾기 위해 절치부심했다.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LA올림픽 100m 금메달을 아버지 곁에 묻었다. ‘금메달은 또 따면 된다’고 각오를 새롭게 한 것. 언론에서는 연일 “20세기 육상 최대 빅 매치”라며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1988년 9월 24일 오후 1시 30분. 잠실 올림픽 주경기장은 7만 5000여 관중으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세계인의 시선이 3번 레인의 칼 루이스와 6번 레인의 벤 존슨에게 모였다.
“제자리에, 차려, 탕!” 관중들의 엄청난 환호성과 플래시 세례를 뒤로 하고 ‘용수철 스타트’라 불렸던 벤 존슨이 가장 먼저 스타팅 블록을 박차고 나왔다. 20m부터 기선을 제압한 벤 존슨은 계속 치고 나갔다. 50m에서 칼 루이스가 1~2m 간격으로 추격했지만 이후 격차는 더 벌어졌다. 본래 60m 이후 스퍼트가 장기였던 칼 루이스는 당황한 듯 앞서나가는 벤 존슨을 힐끔힐끔 쳐다봤다. 결승선을 통과하기 직전 벤 존슨은 왼쪽의 칼 루이스를 돌아보고는 오른팔을 하늘로 쭉 뻗으며 승리를 만끽했다. 9초79. 경이적인 세계신기록이었다.
이어 9초92로 결승선을 통과한 루이스는 포효하고 있는 벤 존슨에게 다가가 축하의 악수를 건넸다. 벤 존슨이 캐나다 국기를 흔들며 트랙을 돌고 있는 동안 칼 루이스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전광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 세계를 뒤흔든 약물 스캔들
‘서울의 신화, 올림픽 역사 불멸의 대기록’, ‘배고파 시작한 달리기, 형에게 질 때마다 울었다’, ‘자메이카에서 캐나다로 이민, 역경 딛고 성공’. 국내외 신문에 대서특필된 벤 존슨의 금메달 획득 스토리였다. 세계는 벤 존슨에 열광했다. 벤 존슨의 드라마틱한 삶도 주목할 만했지만 “과묵하고 성실한 벤 존슨이 말 많은 칼 루이스를 꺾어 기쁘다”는 한 외신기자의 말처럼 칼 루이스는 미운털이 박혀 있었다.
사흘 후인 9월 27일 아침. 벤 전슨에게 열광했던 전 세계가 이번에는 크게 탄식했다. 벤 존슨이 금지약물인 아나볼릭 스테로이드(근육형성촉진제)를 복용한 혐의로 금메달과 기록을 박탈당한 것. 신문 제목은 ‘전세계의 비극’, ‘상업주의가 전세계 우롱’, ‘캐나다 국민들도 분노’ 등으로 바뀌었다. 벤 존슨이 어머니와 함께 황급히 김포공항을 빠져나가는 모습이 종일 뉴스를 장식했다.
칼 루이스는 전년도 로마세계육상선수권대회에서 벤 존슨이 세계신기록을 세우며 우승하자 그의 약물복용설을 제기해 ‘비겁한 떠벌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이 의혹이 사실로 드러나자 칼 루이스는 명예회복에 성공했다. 칼 루이스는 기자회견에서 “존슨이 충격을 딛고 재기해 다시 멋진 경쟁을 할 수 있게 되길 바란다”고 덕담을 건넸다. 세상은 다시 칼 루이스를 주목했다.
◆ 세기의 대결 이후
칼 루이스는 1991년 도쿄 세계선수권대회 100m에서 9초86의 세계신기록을 세우며 우승해 절정의 기량을 과시했다. 이후 100m 선수로는 쇠락의 길을 걸었지만 올림픽 멀리뛰기 4연패, 총 9개의 금메달을 따내며 육상의 살아있는 전설이 됐다.
1996년 애틀란타 올림픽을 2개월 앞두고 100m 라이벌이었던 동료 육상스타 르로이 버렐과 동성애 연인 관계라는 설이 제기돼 팬들을 충격에 빠뜨리기도 했다. 1997년 현역에서 은퇴한 후 그는 영화배우 및 자선사업가로 활동했다. 현재는 2010년 개봉을 앞둔 보석강도 영화 ‘62 픽업’에 조연으로 출연하고 있다. ‘칼루이스 재단’을 만들어 육상 꿈나무들도 후원한다.
벤 존슨은 약물 사건 3년 후 다시 트랙으로 돌아왔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100m에 출전했지만 준결승에서 탈락하자 다시 약물에 손댔다. 1993년 2월 캐나다 몬트리올 육상대회에 출전했다가 남성호르몬 테스토스테론을 복용한 사실이 드러나 영구 자격정지 처분을 받았다.
이후 아르헨티나의 축구영웅 디에고 마라도나, 카다피 리비아 최고지도자의 셋째 아들 알 사디 카다피의 개인 트레이너로 일했다. 2003년에 카다피가 이탈리아 프로축구 페루자팀에 진출하자 팀의 트레이너로 고용됐다. 그러나 카다피가 데뷔 첫 경기를 마치자마자 약물을 복용한 사실이 드러나 “그 스승에 그 제자”라는 비판을 받았다.
벤 존슨은 이후 종종 방송에 출연해 “서울올림픽 도핑테스트 당시 소변이 잘 안 나와 칼 루이스의 친구가 건넨 맥주를 마신 게 문제였다”며 “약물 파동은 칼 루이스의 음모”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현재는 독일 등지에서 육상선수들을 육성하는 지도자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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