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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고종 "안중근 구출하라" 러시아에 밀사

쥴라이신부 2009. 8. 30. 08:28

"안중근 구출하라"

고종, 러에 밀사(密使)

'재판 관할권' 변경 시도

 

"排日의 本元은 한국 황제"… 日, 안중근 의거 배후로 고종 지목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 의거로 체포된 직후, 고종이 블라디보스토크에 밀사를 보내 안 의사 구출 작전을 펼친 사실이 밝혀졌다. 또 일본 정부가 하얼빈 의거의 배후 세력으로 고종을 지목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안중근·하얼빈학회 공동대표인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국사학)는 28일 하얼빈 의거 이듬해인 1910년 2월과 3월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일본 총영사가 고무라(小村) 당시 일본 외무대신에게 보낸 기밀보고서 3건을 공개했다. 이 기밀보고서는 경성에서 하얼빈을 거쳐 1910년 1월 27일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고종의 밀사 2명이 안 의사를 일본 법정에서 러시아 법정으로 관할권을 옮겨 구해내려 했던 동향을 추적하고 있다. 단발 양복 차림인 이 밀사들의 이름은 '송선춘'과 '조병한'이며, 송선춘은 37~38세의 관리 출신으로 일본어와 영어에 능숙하고 일본과 미국에도 다녀온 적이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1910년 2월 17일자 '태황제밀사(太皇帝密使)'라는 제목의 보고서는 이들 밀사가 블라디보스토크 거류민회에 출석, "아태황제(我太皇帝·고종) 폐하의 칙명(勅命)을 받고 이렇게 폐하의 친새(親璽)가 찍힌 밀서를 가지고 여순(旅順) 옥중에 있는 안중근을 구해내어 러시아령에 있는 우리 동포와 함께 극력 이를 러시아의 재판에 맡기기 위해 당지에 왔다"고 말했다고 기록했다. 닷새 후인 2월 22일자 보고서 '한황(韓皇)의 밀사 송모(宋某)에 관한 건'은 "위 밀사는 도착 당시 다수의 한인으로부터 어느 정도 진위를 의심당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한인들이 위 밀사 밀칙(密勅)을 믿기에 이르렀다"고 썼다.

고종이 파견한 밀사를 현지 한인들이 신뢰하고 있다는 1910년 2월 22일자 일본 기밀보고서‘韓皇密使宋某에 관한 件’.

3월 2일자 보고서 '한국 궁정으로부터의 밀사'는 "밀정의 말에 의하면, 목하 이곳을 떠나 여순으로 간 송·조 두 사람의 밀사는 결코 위물(僞物·가짜)이 아니고, 니코리스크 시에서 사망한 이용익도 한황(韓皇)의 밀사로서 당시 그가 가지고 온 내탕(內帑) 잔금 7000엔은 지금도 최봉준의 집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고 했다.

이날 자 보고서는 특히 "배일(排日)의 본원(本元)은 물론 한국황제라고 한다. 재작년 경성 및 평양 사람 다수가 와서 배일을 종용한 것도 궁정이 준 돈으로서 이 무렵부터 당지의 거류민회 및 신문사가 점차 세력을 얻게 되었다고 하고, 작년 10월 하얼빈에서의 흉변(凶變) 사건도 궁정으로부터 연추(煙秋·크라스키노)의 최재형 집으로 선동해온 것으로서…"라며 안중근 거사의 배후로 고종을 지목했다.

한편 소네 조선통감이 1910년 1월 8일자로 고무라 외무대신에게 보낸 또 다른 보고서는 안중근 의사를 구출하기 위해 고용한 상하이의 영국인 변호사 더글러스의 변호 비용을 고종 측근인 민영익·민영철·현상건이 댔다고 기록했다.

이처럼 고종이 파견한 두 밀사는 연해주 한인들을 상대로 안중근 의사 지원을 호소하는 등 구출 작업에 나섰고, 더글러스 변호사도 여순법정에 출석했지만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변론을 거부당해 안 의사는 결국 사형 판결을 받았다.

이태진 교수는 "이들 밀사는 고종이 1902년 국내 첩보와 해외정보 수집을 위해 설립한 첩보기관 익문사(益聞社) 요원으로 추정된다"면서 "기밀보고서는 고종이 연해주에 건설한 항일 독립운동기지를 배경으로 하얼빈 의거가 일어났고, 일본측이 이런 사실에 주목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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