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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세계 산악지도에 한글명 '직지봉' 남긴 산악인

쥴라이신부 2010. 1. 29. 21:41

"여보, 잘 가요. 저 세상에서라도 하고픈 등반 실컷 하세요"

히운출리에서 사라진 고 민준영과 그의 아내 정미영의 애끓는 망부가

 

산악인, 특히 자일을 생명 줄 삼아 극한의 행위를 펼치는 전문 산악인의 아내는 늘 마음을 졸이며 지낼 수밖에 없다. ‘산=위험 또는 사고’란 등식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기 때문이다. 정미영(鄭美永·35·타기 클라이밍센터 대표)씨도 그랬다. 지난 여름 남편 민준영(閔俊英·35)이 파키스탄의 스팬틱(Spantik·7,027m) 정상 공격에 나선 이후 며칠째 연락이 오지 않자 가슴이 타들어가는 듯했다. 그래도 그때는 곧 등정 소식이 전해졌고 남편은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다.

지난  9월 남편이 안나푸르나 산군의 히운출리(6,441m) 등반에 나섰을 때는 직지원정대 카페를 아예 들여다보지도 않았다. 출국 전 히운출리 북벽이 위험한 대상지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남편의 철두철미한 성격상 위험한 상황에 빠져들지 않을 것이고, 그녀로서는 모르고 지내는 게 속 편하겠다는 생각에서였다.

9월 25일 오전,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남편과 함께 실내인공암장을 5년째 운영해온 그녀는 날씨가 나빠 운동하러 오는 사람이 없으리라는 생각에 집에서 쉬고 있었다. 사르르 잠이 들었다. 핸드폰에서 문자 메시지 신호음이 여러 차례 울렸다. 참다 못해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제발 전화 좀 받아요’. 시동생 규영씨의 연락이었다. 순간 온몸이 얼어붙는 듯 식어버렸다. 떨리는 손가락으로 컴퓨터를 켜고 히운출리 직지원정대 카페에 들어갔다. ‘민준영 등반대장과 박종성 대원, 북벽 등반 직후 연락 두절’이라는 글이 모니터 화면을 꽉 채우고 있었다. ‘사실이니 믿어야 한다’는 강한 메시지 같았다.

머릿속이 하예졌다. 그래도 그날 저녁 ‘눈사태 사고가 아닌, 단순 무전 단절’이란 현지의 연락에 살아 있으리라는 기대를 했다. 나쁜 생각을 갖지 않으려 애를 썼다. 그녀에게 남편은 늘 강하고 철저한 사람이었다. 사고가 날려야 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사흘째 접어들자 ‘지금 하산 중이라면 먹을 게 다 떨어져 무척 힘들 텐데’ 싶었다. 그러나 실종 8일째인 추석 전날 아침이 밝아오자 마음이 정리되었다. 이제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싶었다.


필리핀 프라낭 해벽으로 신혼여행 나선 골수 클라이머 부부

민준영은 2000년 청주 최초의 실내인공암장 ‘솔봉이’를 동호인들과 힘을 모아 만든 데 이어 2004년 봄부터 대형 실내인공암장인 타기 클라이밍센터 2개소를 운영하며 충북 스포츠클라이밍 발전을 위해 큰 역할을 해온 산악인이었다. 개개인의 능력에 맞는 ‘맞춤형 실내인공암장 훈련 프로그램’을 개발해 클라이머들의 기량 향상에 큰 도움을 주었고, 인공등반 붐을 일으키는가 하면  2008년 파키스탄 히말라야의 6,230m 무명봉 초등에 성공해 ‘직지봉’이란 이름을 남겨놓았을 뿐 아니라 지난 여름 파키스탄 히말라야의 난봉 스팬틱 북서 필라 세계 초등에 성공하기도 했다.

2008년 요세미티 조디악 등반을 앞두고 다정히 껴안고 있는 정미영·민준영 부부.

아내 정미영씨 역시 골수 클라이머다. 1999년 충북등반학교 정규반에서 처음으로 암벽등반을 배운 그녀는 2002년 엘캐피탄(이하 엘캡) 노즈를 등반한 데에 이어 2004년에는 유럽 암장 순례를 다녀오고, 2002년 이후 다섯 차례나 나선 태국 프라낭 전지훈련을 통해 자신의 등반능력을 5.13a까지 끌어올린 바 있다. 2004년 봄부터 남편과 함께 타기 클라이밍센터를 운영해왔다.

차가운 바람이 불어대는 12월 초 청주 방서동의 타기 클라이밍센터를 방문했을 때, 정미영씨는 텅 빈 실내암장을 지키고 있었다. 제법 널찍한 암장에 설치해놓은 수많은 홀드는 클라이머들의 손때가 진하게 묻어 있고, 땀 냄새도 살짝 풍겨왔다. 지난 11월 중순 남편이 사고를 당한 히운출리가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안나푸르나 남벽 베이스캠프를 다녀온 정미영씨는 사고의 슬픔을 어느 정도 이겨낸 듯 차분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16년간 남편 민준영씨와 쌓아온 인연을 엉킨 실타래 풀 듯 얘기해 나갈 때 순간순간 북받쳐 오르는 슬픔을 참을 수 없는 듯 얼굴이 일그러지곤 했다.

청주 태생인 민준영은 구미전자공고 2학년 때 인생관이 바뀌었다고 한다. 잉꼬부부이자 자상한 아버지의 전형을 보여주던 부친이 환갑도 넘기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자 충격을 받은 민준영은 틀에 갇혀 지내는 모범생이 아닌 자유로운 집시처럼 살고 싶어했다. 그 성향은 방송통신대학을 다니며 만난 이들과 함께 풍물놀이 모임 ‘솔봉이’를 만들게 했다. ‘나이가 어리고 촌스러운 티를 벗지 못한 사람’이란 의미의 솔봉이란 말 그대로 회원들은 대부분 순수하고 어리숙했다. 이들과 함께 북 치고 꽹과리 두드리는 것도 좋았지만 함께 어울려 책을 읽고 산에 다니는 것 또한 한없이 즐거운 일이었다.

2008 마운틴하드웨어 빅월 페스티벌 결선에서 탈론을 걸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던 고 민준영.

‘집’이라는 틀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고픈 마음에 고교 졸업 후 고향인 대전을 떠나 청주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한 정미영씨가 민준영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93년 가을 LG정보통신(현 LG전자) 입사 직후였다.

“같은 해 봄 입사해 선배인 민준영씨가 손에 들고 있는 책을 볼 때마다 성향이 비슷하다 싶었어요. 그 시절에 책 읽기에 흠뻑 빠져 지냈어요. 한 해 100권 가까이 책을 읽었으니까요. 둘이서 책 얘기를 나누노라면 정말 시간 가는 줄 몰랐고요.”

사회과학도서에 심취해 지내던 두 사람은 한때는 노동운동가의 꿈을 꾸기도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마음을 가장 편하게 해준 것은 산이었다. 두 사람은 솔봉이 회원들과 어울려 매달 두세 번씩 함께 산을 올랐다. 산에 가면 그렇게 편할 수 없었다

 

등반 욕심에 멀쩡한 직장 그만두고 실내인공암장 운영

백두대간 종주산행에 빠져 지내던 1997년 봄 민준영은 충북등산학교 정규반에 입교를 했다. 산을 제대로 다니려면 올바로 배워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그에게는 당연한 길이었다. 등산학교 졸업 후 동문을 주축으로 하는 산악회에 입회했다. 하지만 순수하면서도 산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할 선배들은 자연 속에서 생활하는 사람답지 않게 권위적이고, 저녁이면 술심부름이나 시키는 등 정도를 벗어난 행동을 너무도 당연스럽게 하곤 했다.

“민준영씨는 산악회라는 굴레를 벗어났어요. 그리곤 가까이 지내오던 친구들에게 등산학교를 들어가게 하고, 그들과 어울려 산을 오르곤 했어요. 1999년 충북등산학교를 나온 저 역시 그들 중 한 명이었고. 친구들 사이에서 민준영씨는 늘 리더였어요. 잘 하는 사람과 어울리면 쉽게 오를 수는 있지만 혼자 노력하는 것만큼 빨리 배울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래서 등반 대상지를 찾아내고 여러 차례의 시도 끝에 자신의 것으로 만든 다음 친구들을 리드하곤 했어요.”

새롭게 선보이거나 필요로 하는 장비가 궁금하면 업체 웹사이트로 들어가 공부를 하고, 직접 구입해 사용하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곤 했던 민준영의 등반은 2001년 들어서면서 다른 방향으로 뻗어나갔다. 거벽등반이었다. 정미영씨와 함께 익스트림라이더등산학교에 입교해 인공등반기술을 배운 민준영은 이듬해 여름 정미영씨와 친구 2명과 함께 미국 요세미티 국립공원의 대암벽 엘캡에 도전했다.

기껏해야 100~200m 높이의 암벽을 등반하다 인공등반에 대해 겨우 눈을 뜬 민준영에게 수직고 1,000m 높이의 엘캡은 하늘을 향해 치솟은 대장벽이나 다름없었다. 그래도 민준영은 물러서지 않았다. 폭염 속의 노즈(The Nose) 등반은 그를 곧 탈진 상태로 만들어 버리고 벽 아래로 끌어냈다. 그런데도 포기하지 않았다. 다른 팀의 등반을 유심히 살펴본 뒤 식수를 포함한 식량과 장비를 4피치 데포지점에 올려놓은 뒤 정미영씨와 파트너를 이루어 다시 등반에 나서 3박4일 만에 엘캡의 정상에 올라섰다.

1 2002년 태국 프라낭 해벽 허니문 등반. 2 2008년 파키스탄 히말라야의 직지봉 정상. 3 2002년 제1회 빅월 페스티벌에서 우승한 고 민준영과 고 박종성.

“저는 당시 암릉 정도 따라다니는 수준이었어요. 그래도 든든한 준영씨가 앞장서고, 또 줄에 매달려 있는 무거운 짐을 끌어 올려주다 보니 해볼 만하다 싶었어요. 아무튼 마지막 날은 다르더군요. 노즈의 최대 크럭스라는 대천장을 오를 때는 눈물이 나올 정도로 힘이 들었으니까요.”

민준영은 타고난 클라이머였다. 인공등반을 배운 지 1년밖에 안 되었고 거벽이라곤 노즈를 딱 한 번 올랐을 뿐인데 2002년 가을 처음 열린 익스트림라이더 인공등반대회에서 우승을 해 많은 사람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노즈 등반이 그를 빠른 시간에 궤도에 올려놓았던 것이다.

민준영과 정미영씨는 천생 바위꾼이었다. 요세미티 등반을 마친 그 해 겨울 화촉을 밝힌 두 사람이 신혼여행지로 택한 곳이 겨울 암벽등반의 메카인 태국의 해벽 프라낭이었다. 두 사람은 사랑도 바위에서 나누었다. 루트를 극복하지 못해 힘겨워할 때는 격려하고, 루트 하나를 끝내면 그 다음 목표를 향할 수 있도록 독려해주었다. 민준영은 2003년 여름 아내에게 여러 명이 함께 등반한다고 얘기하곤 엘캡의 쇼티스트 스트로(Shortest Straw)를 홀로 등반하기도 했고, 정미영씨는 2004년 여름 고 고미영씨와 함께 유럽 암장 순례를 나설 만큼 두 사람은 등반에 몰입해 지냈다.

“쇼티스트 스트로는 총 15피치로 비교적 짧은 코스이지만 1개의 A4+급 피치와 2개의 A4급 피치, 6개의 A3급 피치로 이루어져 난이도가 높은 루트예요. 당시까지 한국인이 등반한 기록이 없었고요. 그렇게 살 떨리고 무시무시한 루트를 혼자 오른 거예요. 저를 속이고 말이에요. 겨울 폭풍설에 시달리고 우박을 견뎌내면서 닷새간 등반하고 난 뒤 귀국했을 때는 그렇지 않아도 마른 얼굴이 반쪽이 돼 있었어요. 손가락에 동상 기운이 있었고요. 그런데 얼굴은 환했어요. 성취감 같은 것을 느꼈었나봐요.”

2004년 5월 두 사람은 큰 결심을 했다. 당시의 수준보다 나아지려면 하루종일 얽매여야 하는 직장생활에서 벗어나 등반에 몰두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솔봉이로선 한계가 있다 생각해온 민준영은 분평동에 100평 규모의 실내인공암장 ‘타기 클라이밍센터’를 만들었다. 아내가 결혼 전부터 모아온 돈에 빚까지 얹어 실내인공암장을 만들었음에도 하나로 만족하지 못한 민준영은 청주 번화가인 사창동에 또 다른 실내암장을 개장했다. 하지만 분평동 암장은 비싼 월세 때문에, 사창동 암장은 입지여건이 좋지 않아 여러 해 동안 운영에 애를 먹어야 했다.

“좋은 훈련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운영에 자신이 붙기 시작한 것은 분평동 암장을 방서동으로 옮기고, 사창동 암장을 개신동으로 옮겨 시동생이 운영을 맡은 2007년 봄부터였어요. 빚을 지며 만든 실내암장을 운영하자니 계획했던 것만큼 자기 운동에 열중할 수 없었던 준영씨가 고산 등반에 관심 갖게 된 것도 그때부터였고요.”

부부이기보다 산을 오르는 동반자이기를 원해

충남산악연맹장으로 열린 남편 민준영씨와 박종성(42·전 충북산악연맹 스포츠클라이밍 위원장)씨의 영결식을 마친 지 닷새 뒤인 11월 16일 정미영씨는 스팬틱원정대 대장이었던 김형일(K2 익스트림 팀장)씨와 선배 김학분(여·충북산악연맹 사무국)씨와 함께 히운출리 베이스캠프를 찾아 나섰다. 너무 지쳐 영양주사를 맞아야 하는 상태였지만 아직 남편의 영혼이 떠돌고 있을 것만 같아 서둘렀다.

안나푸르나 산군이 파노라마로 펼쳐지는 포카라를 출발, 베이스캠프를 향하는 사이 설봉이 나타나면 환하게 웃는 민준영의 얼굴이 떠올랐다. 엘캡의 700m 절벽에 매달아놓은 포타레지에 누워 있을 때 쳐다보던 사랑스런 모습 그대로였다. 5.13 루트를 오르다 힘겨워할 때 ‘조금만 더 힘내라’ 응원하던 그 얼굴이었다.

2002년 엘캡 등반은 그녀에게 많은 추억을 남겨주었다. 서니사이드 캠프장에서 민준영과 밤새 산 얘기로 꽃을 피웠던 기억도 되살아났다. 2008년 남편과 함께 엘캡 조디악을 등반했을 때는 뜻밖에 수월했다. 하지만 정상에 오른 뒤 남편이 발목을 삐끗하는 바람에 남편의 짐까지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내려와야 했던 힘든 기억도 떠올랐다.

2008 엘캐피탄 조디악 등반중 정미영씨가 남편 민준영을 바라보면 웃고 있다.

하지만 이후 인공등반에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다. 나이 먹으면 체력이 떨어져 열중하기 쉽지 않은 스포츠클라이밍과 하드프리 등반에 전념해 한 단계라도 난이도를 끌어올리고 싶어서였다. 2009년은 남편이 두 차례나 요세미티를 다녀오고, 히말라야 고산 원정도 두 차례나 나서는 바람에 마음껏 등반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남편이 히운출리 등반을 마치고 돌아오면 프라낭으로 달려가 바위에 실컷 매달릴 생각이었다.

안나푸르나 남봉 옆에 삐쭉 솟구친 히운출리가 보이면 ‘준영씨 영혼이 산 너머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조급해지기도 했다. 민준영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려왔다. 인공암벽 개장 후 5년간 너무도 힘이 들었다. 1억 이상 불어난 빚을 갚기 위해서는 등반 욕심을 참고 운영에 신경을 써야 했다.

“그래서 더욱 마음이 아팠어요. 빚도 거의 다 갚았고, 그래서 민준영씨가 산만 다니겠다 하더라도 얼마든지 응원해주고 존중해줄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으니까요. 제 마음을 추스르려고 애도 많이 썼어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까, 암장 운영은 어떻게 해야 할까 등등 매일 저녁 일기장에 적고 다음 날 저녁 다시 그 내용을 보면서 가다듬고 또 가다듬었어요.”

민준영은 정미영씨를 아내이기 이전에 산을 오르는 동반자로 생각했기에 등반 기회를 많이 주려고 애를 써왔다. 그런 기억들이 떠오를 때면 ‘이젠 발전된 내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닷새간 산길을 걸어 북면 베이스캠프에 들어섰건만 얄밉게도 구름이 히운출리를 가리고 있었다.

“민준영씨는 극한 심리학에 대해 늘 궁금해했어요. 어찌 보면 등반이 극한 상황을 경험하기 위한 방편이었는지도 몰라요. 민준영씨 머릿속은 24시간 등반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어요. 산우들과 술을 마시면서도 그랬고, 원정 등반 중 베이스캠프에 머물 때에도 ‘이 등반의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으로 가득했으니까요. 히운출리에서도 마찬가지였어요.”

‘힘들 때 스스로의 한계를 경험하고 이를 극복하는 데에서 오는 희열을 내게 준다. 하지만 커다란 동기는 성공의 순간, 극기의 순간이 아닌 내 한계점을 느끼기까지의 인내, 서서히 힘들어져 오는 느낌, 익숙한 고통을 겪어내면서도 포기하지 않는 끈질긴 의지의 확인, 이런 지속적인 고통스런 시간과의 만남이다. 이런 고통을 겪으면서 그리고 이겨내면서 어느 새 삶에 대해서, 나에 대해서 더 여유있게 다른 생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중략) 내게 등반이 이렇게 자리잡은 것 같다. 사람들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것, 내가 행하는 등반이 누군가에게 가치 있는 희망을 줄 수 있게 되었다는 점, 이것이 이제는 너무나도 크게 날 만들어 가는 것 같다.’


“저 세상에서라도 하고픈 등반 실컷 하라 기원했어요”

정미영씨는 직지원정대 대원들이 전해준 남편의 등반일기를 들춰볼 때마다 마음이 울컥했다. 히운출리가 슬쩍 모습을 보일 때면 일기의 내용이 떠올라 더욱 마음이 아팠다. 보고 싶은데 볼 수 없다는 것, 손으로 만지고 싶은데 만질 수 없다는 현실이 너무도 가슴 아팠다.

그녀는 히운출리가 잘 바라보이는 바위 옆에서 남편과 박종성씨를 위한 제사를 지냈다. 남편의 새 안경과 책 그리고 암장 식구들의 편지를 올려놓고, 2002년 익스트림 인공등반대회 때부터 함께 등반해온 고 박종성씨의 아내와 아이들의 편지 그리고 어머니가 싸주신 과일을 올려놓았다. 절을 한 번 할 때 너무도 사랑스런 남편과 만들었던 추억을 떠올리고, 또 한 번 할 때는 ‘혼자서라도 잘 해내겠다’고 남편 앞에서 다짐했다.

1 혼신의 힘을 다해 운영해온 타기 암장에서. 2 2009년 겨울 덕유산 향적봉 대피소. 3 조디악 등반 중 포타레지에 누워 있는 정미영씨.

‘준영씨. 이제 발전된 내 모습을 보여줄 수 있고, 당신을 사랑해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동안 준영씨한테 의지하며 지내다보니 내가 조금은 연약하게 살았는지도 몰라요. 이젠 열심히 살 거예요.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잘 가요. 저 세상에서는 하고픈 일 더 마음껏 하고.’

제사를 지내고 나니 정미영씨는 마음이 조금이나마 편안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가벼운 마음으로 제사상에 올려놓은 물품을 타임캠슐에 넣어 히운출리가 잘 바라보이는 바위 밑에 묻어놓고, 다시 한 번 늘 환한 미소를 머금고 살아온 남편 민준영의 얼굴을 그릴 수 있었다.

“그이가 사놓고 써보지 못한 안경과 읽지 못한 <몰입의 즐거움> 책을 타임캡슐에 넣었어요. 다시 한 번 다짐했어요. 잘살 테니 염려 말라고. 그리고 부탁했어요. 저 세상에서 하고픈 등반 실컷 하라고요. 내년 1주기 때 혹시 베이스캠프에 가게 되면 꺼내 볼 거예요. 민준영씨 혼이 다녀갔는지도 모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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