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о삶의 이야기о♡

우리지역 전설과 설화(신부가 사는 지역)

쥴라이신부 2009. 9. 15. 11:05

 
금샘 전설
금정산 정상인 고당봉 옆에는 바위로 된 샘 하나 있는데 여기에는 한 가지 이야기가 있다.
[동국여지승람][동래부지] 등에 기록된 전설에 의하면 산정에 돌이 있어 높이 3장가량이고 물이 늘 차 있어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금빛이 있으므로 금색어가 다섯 색깔의 구름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와 그 샘에서 놀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금정산성 전설
금정산성의 전설을 말하자면, 동래부사 정현덕이 동문과 서문의 재건에 힘쓰고 있을 때의 이야기가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 이야기를 살펴보면 그는 두 성문을 보다 완벽하게 세우기 위해 이름난 석공을 두루 수소문하여 찾아냈는데 결국은 사제지간인 두 석공에게 두 성문의 재건을 의뢰하게 되었다고 한다. 동문은 선생에게, 서문은 제자에게 맡겨 서로 경쟁을 시켰다고 한다. 서문을 만드는 제자는 기술이 앞서 정교한 아름다움을 살렸으나, 동문을 담당한 선생은 원래 야욕이 많은 사람이라 욕심을 내어 웅대하게만 세우려 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두 성문은 사제의 이러한 특성이 담겨질 수 밖에 없었다.
마침내 제자가 먼저 서문을 완공한 뒤 동문의 스승을 찾아가 보았으나 스승은 아직 성문도 달지 않은 상태였다. 또한 동문은 서문에 비해 규모는 웅대하지만 견고하지 못해 결국 제자의 승리로 끝나고 말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또 당시 스승은 제자의 뛰어난 기술을 시기하고 질투하여 한때는 살해할 음모까지 꾸민 일도 있었다고 한다. 이에 주민들은 그 스승을 미워하고 제자의 기술을 칭송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 사제는 동문과 서문의 공사가 끝난 뒤에는 서로 힘을 합쳐 밀양의 영남루 공사를 하였다고 한다.
현재의 동문과 서문은 물론 그 때의 모습은 아니지만 지금도 동문과 서문의 차이가 사제지간이었던 두 석공의 특성을 그대로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서문은 금정산성 4대 성문 가운데 유일하게 계곡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 예술적인 감각이 가장 앞서고 있다.
금정산과 고당할미전설
금빛 물고기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논다는 금샘이 있는 금정산 최고 봉우리인 고당봉에는 평생을 불심으로 살다 죽은 한 화주보살의 이야기가 서려 있다. 신라시대 때 의상대사가 창건한 범어사는 목조건물인데다가 잦은 화재에 시달렸다. 그 첫 번째로 임진왜란을 만나 모든 건축물들이 잿더미로 변했다. 동래성을 함락한 왜군들은 울산지방에 상륙한 부대와 합류하기 위해 길을 재촉하다 신라 이래 면면히 내려오던 화엄 10대 사찰인 범어사의 웅장한 기운을 그대로 둘 리가 만무했다. 특히 대마도를 향해 선 고당봉 아래 왜군들의 침략을 방지하기 위한 상징적인 의미까지 지닌 범어사는 왜군들의 방화에 불타버렸다. 이 때 밀양에 살던 화주보살은 범어사가 불탔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와서, 절을 잃고 망연자실한 스님들을 위해 동분서주하기 시작했다. 전국을 돌며 시주를 받은 할머니는 스님들의 음식을 만들고 수발을 들면서 불가에 귀의하였다.
"내가 죽기 전에 우람했던 범어사가 다시 제모습을 찾을 수만 있다면. . ."
화주보살은 몸을 아끼지 않고 범어사 중건을 위해 전력을 기울였다. 하루도 빠짐없이 시주를 해오는가 하면 절의 살림도 도맡아 꾸려나갔다.
"가난한 집에는 제사도 많다든가!" 빈궁하기만 한 절 살림을 도맡아 꾸려가던 화주보살은 어느날 주지 스님께 조용한 유언을 남겼다.
"내가 죽으면 화장을 하고 저 높은 봉우리 아래에 고모선신(姑母善神)을 모시는 사당을 지어 고모제(姑母祭)를 지내 주면 금정산의 수호신으로 변해 범어사를 도우겠습니다."
평생을 범어사 재건을 위해 몸바쳐 살던 화주보살은 죽어서도 범어사를 보호하기를 소원했다. 스님은 화주보살의 고귀한 뜻을 살려 그의 유언에 따라 고당봉에 사당을 지어 1년에 두 번씩 (음력 1월 15일, 5월 5일) 고당제를 지내게 되었다. 그 후 화주보살의 유언처럼 범어사는 다시 중건하게 되었고 화엄의 대표적인 사찰로 자리잡았다. 이 때부터 이름을 얻지 못하던 금정산 제일봉은 화주보살의 거룩한 뜻을 기리기 위해 할미고에 집당을 사용해 고당봉으로 불리게 되었다. 고당봉의 화주보살 사당은 고당약수터에서 고당봉으로 오르는 길로 가다 보면 왼쪽편 가파른 절벽사이에 초라하게 서 있다.
그 후 사당이 고당봉의 전경을 망치고 무녀들이 많이 드나들어 촛불로 인한 화재위험이 있다고 하여 헐었으나 그 때마다 범어사에 흉한 일이 생겼다고 한다. 얼기설기 엮어져 있는 고당봉 바위틈 사당에 얽힌 이야기는 '범어사 서기궤유전'의 '산령축'에 나온다.
국청사 전설
이 곳 국청사에는 대웅전이 있는 사찰의 뜰을 들어서기에 앞서 그 언덕 아래에 있는 연못을 만나게 되는데 200평 가량의 이 연못 가운데에는 근래 세운 3층 석탑이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에 따른 전설에 의하면,
그 옛날 둥근 연못 남쪽에는 약수 우물이 솟았는데, 위에는 더운 약수가 밑에는 찬 약수가 나왔다는 영험한 우물이라, 선녀들이 하늘에서 내려와 목욕을 하였다는 전설이 지금도 전해 내려고 오고 있다.
그 외에도 법당에서 염불을 하면 전쟁 중에 죽어 가는 신음소리, 날짐승 동물들의 울음소리에 도저히 기도를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이에 창봉선백과 혜성 주지스님께서는 심혈을 기울여 1982년 맑은 약수가 샘솟는 연못을 확장하고 한 가운데 지장 보살 보원 3층탑을 세워 자연석으로 연못을 아름답게 조경 하였다.
3층탑 기단부에 4마리의 용은 보주를 희롱하고 기단 상층에는 12지신상을 사방으로 배치하였으며, 탑신부 1층 동서남북 사면에는 관음 지장허공장 보살이 좌정하고 있다.
탑두부 상부에는 8방으로 뻗은 가지 끝에 연꽃이 피어 있다.
지장 3층탑을 건립하여 구천에 헤매는 영가들을 용을 타고 극락 세계로 천도하였으며 그 뒤로부터는 울음소리가 가시고 청정한 부처님의 기도도량이 되었다고 한다.
즉 연못 가운데 3층탑을 세움으로써 영령들의 원혼을 달랠 수 있었다는 이야기인 것이다.
미륵사 전설
때는 신라 신문왕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왜구들은 툭하면 신라에 쳐들어 와서는 약탈을 해 가기 일쑤였다. 여기저기 군사들이 경계를 섰지만 나라내의 첩자들이 왜구와 내통하여 조금만 허술한 곳이면 쳐들어와 약탈해 갔다. 원효는 고민에 빠져 있었다. 왜구를 죽일 것인가, 아니면 백성이 죽고 다치는 것을 보고만 있어야 할 것인가... 어쨌든 둘 다 사람이 죽게 되는 일이다. 그는 5만의 군사가 쳐들어 올 것이라는 예견을 하고 있던 터였다. 그는 왜구를 타이르기로 하고 그래도 말을 듣지 않으면 살생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바다 멀리서 새까만 왜구의 배 들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아랫마을에 가서 호리병 다섯개를 구해 오너라." 원효는 사미승에게 그런 심부름을 보낸 뒤, 산위 성안에 가장 높은 바위에 신라 장군기를 꽂았다. 그리고 이내 호리병을 가져온 사미승에게 또 다른 일을 시켰다. "아랫마을로 가면 길손 둘을 만날 것이다." 사미승은 곧장 내려갔다. 거기엔 두사람이 서로 나즈막히 말을 주고 받았다. 사미승은 그들이 왜구 병사라는걸 알아 차렸다. 한명은 저 위 장군기가 있으니 분명히 많은 신라 군사가 매복되어 있을 것이라 주장하고 다른 한명은 군사들 이 있기엔 너무 조용하기 때문에 그렇지 않다는 주장이었다. 그런 중에 그들은 사미승을 발견하고는 그에게 묻기로 하였다." 우리가 길을 잃었는데 길 좀 물읍시다." "예, 어디로 가십니까?" "저기 저 깃발 너머엔 군사들이 있는지요?"
"글쎄요... 저는 이 산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잘 모릅니다." 그 말을 들은 그들이 산아래로 향하려 할 때였다. "거기 두 분은 잠시 들렀다 가시오!" 원효가 산아래로 소리 쳤다. 그들은 곧 원효앞에 나아갔다.
"어디서 오셨습니까?" "기장에서 왔습니다." "왜군을 보셨죠?" "아니오 보지 못했습니다." "너희 자신을 못봤다고 이 왜놈들!"
원효는 호리병중 두개의 목에 붓으로 선을 둘렀다. 그러자 그들의 목에 피멍이 둥글게 생기더니 고통을 안겨 주었다. 그리고 원효는 나머지 세 개에도 붓으로 선을 그은 후 주면서 말하였다." 가서 너희 대장에게 알려라. 이대로 돌아가지 않으면 죽음을 면치 못 할 것이라고..." 그들은 이내 대장에게로 갔다. 모든 걸 소상히 들은 대장은 분노하여 칼로 그 호리병을 베어 버렸다. 그러자 대장 자신의 목이 꺾이더니 피를 토하며 죽어 버렸고 왜구들은 곧장 뱃머리를 돌려 돌아갔다.
당시 왜적 첩자를 유인하기 위해 대사가 장군기를 꽂았다는 바위구멍이 아직도 독성각 옆에 그대로 남겨져 있다.
또한 독성각으로 오르는 좁다란 돌계단 길의 중간 부분에 석간수가 솟아나는 사각형의 샘이 있는데 여기에는 쌀바위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매일 아침 작은 바위구멍에서 한톨 한톨 쌀이 떨어져 스님이 이 쌀로 끼니를 이어 갔다고 한다. 그런데 한 사미승이 자신의 욕심에 한꺼번에 많은 쌀이 나오라고 구멍을 작대기로 쑤신 뒤로 쌀 대신 물이 나오게 되었다고 한다.
어산교 낭백스님 전설
조선 때 사찰에 부여된 부역수가 36종이나 이르러서 수많은 불자들은 부과된 부역에 종사하기에 바쁜 나날이었다. 스님은 이러한 당시의 사정을 뼈아프게 개탄하고 부역을 면하고 살아야겠다고 결심하였다. 설사 금생에 안되면 내생에라도 부역을 면하고 마음껏 공부할 수 있게 하리라 마음 먹고 부처님께 소원을 다하였다.
원력을 짓기 위해 기찰부근 큰 소나무 밑에 샘물을 파서 식수를 제공하고 밭을 개간하여 과일, 채소 등을 심어 행인에게 무한정 나누어 주고 짚신도 삼아서 보시하였다. 그런데 스님이 돌아가시게 되자, 스님은 그를 따르는 많은 불자들 앞에서 3가지 과제를 던져 주셨는데, 그 중 세 번째가 내가 죽어 다시 환생하여 나라의 고급관리가 된다면, 모든 관리가 다 일주문까지 와서 말에서 내리는데, 자신은 어산교 앞에서 내리겠다고 하였다.
그 뒤 스님은 열반에 들고 그 제자들은 늙었으나 낭백스님의 그 눈물겨운 원력이 성취될 날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던 어느날, 마침 순상국(巡相國)이라는 중앙의 높은 벼슬을 지닌 사람이 온다고 전갈을 받자, 범어사 스님들은 어산교까지 나가서 행렬을 지어 부복하고 기다렸다. 그런데 이 사람은 일주문까지 말을 타고 올라 오는 상례를 깨고 어산교 앞에 와서 말에서 내리는 것이었다. 순상국 조공은 낭백 스님의 원력을 성취시킨 사람이므로 낭백스님의 환생임에 틀림 없다고 믿었다
계명봉(鷄鳴峰) 전설
금정산 동북쪽에 우뚝 솟은 봉우리에서 납자들이 수행정진을 했다. 그런데 납자들이 새벽 예불을 드릴 때가 되면 하늘에서 닭의 울음소리가 들려와 정확하게 그 시간을 알려 주었다. 그래서 그 봉우리가 '계명봉(鷄鳴峰)'으로 불려지게 됐다고 한다.
또한 의상대사가 계명봉 서쪽 고개에서 절터를 찾던 중 한밤중에 난데없이 닭이 울었으므로 그곳에 절을 지은 것에서 유래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효의사(曉義寺)라 불린 그 절은 사라지고 없지만, '계명봉'이란 이름이 생겨난 전설이 되고 있다.

「범어사 창건사적」중 창건에 대한 기록을 보면, 문득 꿈 속에 신인이 나타나, "대왕이시여, 태백산중에 의상이라고 하는 한 화상이 있는데 항상 3천명의 대풍을 거느리고 화엄법문을 연석하고 화엄신중과 40법체 그리고 제신 및 천왕이 항상 떠나지 않고 수행한다. 동국해변에 금정산이 있고 그 산정에 높이 50여척이나 되는 바위가 우뚝 솟아 있는데, 그 바위 위에 우물이 있고 그 우물은 항상 금색이며 사시사철 언제나 가득차고 마르지 않고 그 우물에는 범천으로부터 오색 구름을 타고 온 금어가 헤엄 치며 놀고 있었다. 대왕께서는 의상스님을 맞아 함께 그 산의 금정암 아래로 가셔서 7일 7야 동안 화엄신중을 독성하면, 그 정성에 따라 미륵여래가 금색신으로 화현하고... 동해에 임하여 제압하여 왜병이 자연히 물러갈 것이다"라고 말했다.
왕은 놀라 깨어났고 아침에 제신들을 불러 꿈 이야기를 하고 사신을 보내 의상을 맞아 오게 했다. 의상과 함께 친히 금정산으로 가서 7일 7야를 일심으로 독경했다는 곳이 고당봉이다.
선녀와 애기소 전설
낙동강이 내려다 보이는 산속 외딴집에 젊은 부부가 살았다. 남편은 강물위에 배를 띄워 고기를 잡고 아내는 주변의 텃밭에 씨를 뿌려 가꾸며 추수하는 행복한 삶을 살았다. 하루하루 큰 어려움 없이 금슬좋게 살아가는 부부였지만 아내에게 오랫동안 태기가 없어 걱정이 되었다.
이에 아내가 차츰 수심이 쌓이게 되어 생각다 못해 부부는 의논하여 천지신명께 백일기도를 올리기로 하였다. 부인은 남편의 승낙을 얻어 집을 떠나 계곡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다가 그곳에 넓은 소(沼)가 있어 조용하고 한적한 이곳이 기도드리기에는 안성마춤이라 생각되어 가장자리 너럭바위에 단정히 무릎을 꿇고 앉아 정성껏 빌고 빌었다.
열심히 기도한지 어언 백일째 되는 날 저녁 한 선녀가 나타나 하는 말이 하늘의 법도에 의해 이 부부사이에는 애기가 없으나 선녀의 노력으로 애기를 점지해 주되 태어난 후 3년 만에 도로 하늘로 데려가야 한다고 했다.
선녀는 이를 약속할 것임을 다짐했다. 부인은 선뜻 약속을 할 수는 없었지만 애기를 얻는다는 말에 거짓약속을 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럭저럭 해가 바뀌어 이듬해 여름 아내는 귀여운 옥동자를 분만하였다.
부부의 기쁜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혹시 선녀가 와서 애기를 데려갈세라 애간장을 태웠지만 아기의 재롱을 낙으로 살고 키워간지 어언 3년이 되었다.
3년째 되는 날 부부는 오늘까지 무사했으니 선녀에게 고맙다는 인사의 말을 전하기 위해 아기를 업고 소로 올라갔다. 그 동안 아기를 빼앗길까 봐 발길을 끊었던 소는 더욱 아름다운 절경을 이루고 있었다.
아름다운 절경에 도취된 아내는 아기를 너럭바위위에 앉혀두고 물에 들어가 목욕을 하며 경관에 정신이 팔려 시간가는 줄 몰랐다. 그러다가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아기가 없어진 것이 아닌가 아기를 돌려달라고 애걸하며, 기도했으나 하늘의 법도를 어길 수는 없는 일 이라며, 아기를 보고 싶다면 밤마다 이곳으로 나오면 매일밤 아기와 선녀가 목욕할 수 있는 것을 볼 수 있다는 선녀의 말뿐이었다.
그 후 사람들은 이곳을 아기가 빠져 죽은 곳이라며, 「애기소」라 불렀다고 한다.
산성마을에서 화명동쪽 산성로를 따라 1㎞쯤 가서 대천교를 지나면 말없는 너럭바위가 전설처럼 누웠다는 애기소가 있다
이 소(沼)에 그믐날 반쪽달이 뜨면 요즘도 선녀가 아기를 데리고 내려온다고 할 만큼 경관이 뛰어난 곳이다.
이무기와 노스님 전설
금정산 고당봉과 원효봉 사이로 깊게파인 골이 낙동강을 향하는 계곡을 이루는 곳이 있다. 이곳은 기암괴석이 층층이 쌓여 있어 골짜기로 흐르는 물은 진주를 뿌려 놓은 듯 알알이 흩어져 내리며 부서지고, 파랗게 고여 있는 담수는 가을 하늘보다 맑고 아름답다.
이 아름다운 계곡의 중간지점 사시골의 파란 담수 위에 떠있는 피둥피둥 살찐 너럭바위 중앙에는 어린애들이 드나들 수 있을 만큼 큰 구멍이 뚫려 있다. 이 바위는 「이무기 동굴」로 사람이 지나가면 더운 바람을 내는 이무기가 살았다는 전설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무기'란 용이 되려다 못되고 물 속에서 산다는 큰 구렁이로 천년을 더 기다려야 용이 된다는 큰 뱀이다. 어느 날 갑자기 천둥과 우레가 치고 안개가 자욱히 깔리더니 다음과 같은 소리가 마을 사람들에게 들려왔다. 「잘 들어라. 나는 천년 묵은 이무기인데 사람을 백 명만 잡아먹으면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간다. 1년에 처녀 한 사람을 골라 달 밝은 보름달에 사시골 너럭바위로 보내라. 그렇지 않으면 큰 재앙이 있을 것이다.」 이무기의 말이 끝나자마자 천둥과 우레가 그치고 햇빛이 쨍쨍 났다. 이 말을 들은 마을 사람들이 회의한 결과 처녀를 매년 바치기로 결정하였다.
그래서 이 마을에서는 재앙을 없애기 위해 이무기에게 처녀를 바치는 일이 가장 큰 행사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마을 처녀란 처녀는 바닥이 나 바칠 처녀가 없었다. 마을 이장은 큰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사시골 위 절간에 계시던 노스님이 이 사실을 알고 막심한 피해를 주고 있는 이무기를 잡아 없애야 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나섰다. 이무기는 금정산의 사시골에서 산삼녹용을 씻어 내린다는 물을 마시고 좌청룡 우백호의 명당지에서 물 속 깊이 살면서 아흔 아홉 명의 처녀를 먹고 이제는 한 명만 먹으면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는 순간이었다. 노스님은 죽을 나이도 다 되어 가는 데 마을에 보시를 해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이무기를 잡을 궁리를 하였다. 노스님은 독약으로 칠한 실을 절 당간지주에 묶고 이무기 너럭바위 위에 알몸으로 손에는 독실을 가지고 달 밝은 보름날 앉아 있었다.
밤 12시경 드디어 동굴에서 만면의 웃음을 머금은 채 서서히 나온 이무기는 이제 한 명만 해치우면 승천한다는 생각으로 처녀인지, 스님인지도 모른 채 노스님을 삼켜버렸다.
그 순간을 학수고대하였던 이무기는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간다고 여겼으나 이것이 웬일일까. 독실까지 삼켰으니 승천이 아니라 너럭바위에서 담수로 떨어져 허우적거리며 죽고 말았다. 지금도 사시골 계곡에서는 맑은 물이 흘러내리고, 승천할 용이 못된 한을 품은 이무기가 살았다는 너럭바위 동굴에는 담수와 말없는 천년의 바위가 앉아 있다.
금성마을과 국청사(國淸寺) 전설
오늘의 산성마을이 폐허로 버려져 있을 때였다. 경남 양산군 철마면(현재 기장군)에 살던 힘이 좋기로 소문난 김 장사(壯士)가 이곳에 들어와 마을을 일구었다. 그는 한꺼번에 수십명의 장정들을 상대로 힘 겨루기 시합을 벌이기도 했고, 혼자서 팥 한 섬을 김해에서 지고 오기도 했다. 더구나 그는 호랑이가 뒤에서 잡아당겨도 꼼짝달싹하지 않았다고 한다.
천하의 김 장사도 처음 국청사 자리에 거주지를 마련했다가 밤마다 전쟁중에 죽어간 이들의 신음소리와 동물들의 울음소리가 무서워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고 한다. 국청사가 세워진 뒤에도 그 오열이 여전히 들렸으나 스님들이 지장보살 보원삼층탑을 세우고 떠도는 넋들을 극락세계로 천도한 이후부터는 청정한 기도도량이 됐다 한다.

 

                             출   처: 부산 금정구청 (geumjeong.go.kr)

                             옮긴이: july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