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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규장각 귀중본을 수위실에 방치하다니…"

쥴라이신부 2009. 9. 5. 10:05

"규장각 귀중본을 수위실에 방치하다니…"

김기철 기자 kichul@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규장각 그 역사와 문화의 재발견
김문식 등 지음|서울대출판문화원|251쪽|1만6000원

일제 식민지 지배가 말기로 접어든 1939년 1월 21일자 조선일보에 〈집도 없는 규장각본〉이라는 기사가 났다. '이조 오백년 왕가의 비장도서로서 궁중 깊이 간직해 두어 두문불출로 내려오던 규장각의 귀중도서 13만 권이 총독부의 손을 거쳐 경성제대 도서관에 자리를 옮겨온 것이 지금으로부터 9년 전인 소화 5년의 일이다…지금에 와서는 서고의 제자리는 남에게 빼앗기고 방화장치도 아무것도 없는 소사실 모퉁이 누추한 단칸방에 삼ㅅ던 싸틋버림을 받게 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있어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놀라게 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승정원일기》《조선왕조의궤》 등 훗날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될 만큼 귀중한 사료들이 신간서적에 밀려 수위실 신세를 지고 있다는 고발기사였다. 규장각 도서를 '이등국민'의 문화잔재로 취급했던 일제의 문화정책을 보여준 사례였다.

정조가 1776년 창덕궁 후원에 세운 주합루. 규장각이 들어있던 곳이다(사진 왼쪽), 일제가 규장각 귀중도서를 소홀 히 다루고 있다고 폭로한 조선일보 1939년 1월 21일자‘집도 업는 규장각본’기사(사진 오른쪽).

이 책은 한국 기록문화의 보고(寶庫)인 규장각(奎章閣)의 역사와 문화를 종합적으로 소개한다. 김문식(단국대) 연갑수(서울대) 김태웅(서울대) 강문식(서울대) 신병주(건국대) 교수 등 규장각 학예연구사를 거쳤거나 관련 시대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집필을 맡았다.

정조 즉위 직후인 1776년 설립된 규장각은 숙종 대의 규장각을 계승하면서도 기능을 대폭 확대한 기구였다. 역대 국왕의 글과 글씨를 보관하던 원래 기능에서 한걸음 나아가 조선과 중국에서 간행된 서적을 수집하고, 여기에 소속된 엘리트 관료들이 학문을 닦고 국가 주요정책을 마련하는 정치기구로 발전했던 것이다.

규장각은 당대 학문과 정보의 '허브(Hub)'였다. 1781년경 규장각에는 중국본(本) 2만권, 조선본 1만권 등 3만권의 책이 소장돼 있었다. 규장각은 활자를 주조해 서적 출판에도 나섰다. 정조대에 규장각에서 편찬된 서적은 153종, 3991권이나 된다. 양과 질에서 모두 뛰어났다. 정조는 규장각에 특별교육과 연구에 종사하는 초계문신제(抄啓文臣制)를 도입, 젊은 엘리트 관료를 육성해 개혁정치의 주역으로 삼았다. 정조대에 선발된 초계문신만 정약용·정약전 형제와 19세기 세도정치를 연 김조순 등 142명이다.

정조 사후 세도정치기에 위축됐던 규장각이 다시 활기를 띠게 된 것은 1873년 고종 친정(親政) 이후이다. 고종은 규장각을 왕의 친위기관으로 활용하려 했다. 특히 서양 관련 서적을 적극적으로 수집, 규장각에 비치함으로써 개화 정책을 추진하는 발판으로 삼았다. 일본 메이지 유신 지도자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던 위원(魏源)의 《해국도지(海國圖志)》 등이 대표적이다.

1910년 대한제국을 강점한 일제는 이듬해 규장각을 폐지하고 규장각 도서를 인수했다. 총독부는 1928년부터 규장각 도서 14만 책을 경성제대로 이전했고, 해방 이후 서울대로 넘어왔다. 규장각의 후신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은 현재 고(古)도서 17만5000여 책과 고문서 5만여점, 책판 1만8000여점 등 28만점의 자료를 소장하고 있다. 그중 《일성록(日省錄)》(국보 153호)《비변사등록부(備邊司謄錄附)》(152호) 《십칠사찬고금통요(十七史纂古今通要》(148호)와 《송조표전총류(宋朝表�}總類)》(150호) 등 7종 7125책이 국보로, 25종 165책이 보물로 지정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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