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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노교사 할아버지의 방학 일기

쥴라이신부 2009. 9. 1. 0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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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老)교사 할아버지의 방학 일기

 

 

충북 음성군 급왕읍 다부내 마을에 사는 김홍덕(69)씨는 이번 여름도 분주했다. 서울에서 내려온 손자, 손녀들에게 자신만의 오랜 교육 철학에 따른 방학맞이 교육을 실천했기 때문이다.

1960년부터 20년 간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했던 김씨는 이후에는 20년 가까이 홀트학교, 명현학교 등 장애인학교 교장을 역임하며 한국 특수학교 계를 개척해온 교육자다. 현재는 은퇴 후 귀향해 100여종이 넘는 나무와 20여종의 특용작물을 재배하며 전원생활 즐기고 있다.

방학이 다가오자 김씨의 손자, 손녀들은 “할아버지 댁에 언제 가냐”며 부모를 들볶았다. 자녀들의 사교육을 아주 무시할 수 없는 김씨 삼남매는 아이들의 성화에 방학 전에 학원 일정 등을 조정해 할아버지댁 방문 일정을 짰다.
손주들의 방학 교육을 시골에서 맡으며 일기를 써나가는 김홍덕 할아버지와 손주들.


올해도 여름방학을 맞아 내려온 다섯 손주와 함께 할아버지의 일기 쓰기도 시작됐다. 보름 동안 손자들을 가르치며 적어간 할아버지의 일기장을 공개한다.

◆ 문제는 ‘대화의 부족’이 아니라 ‘놀아주기의 부족’

8월 1일(토)
녀석들을 만나면 나도 똑같은 어린아이가 돼 씨름하고 뒹굴고 뛰기도 하고 칼싸움도 함께 하게 된다. 꼬마들과 달리기를 하면 할아버지는 언제나 꼴등! 의기양양해진 녀석들은 “할아버지는 멸치 좀 더 드셔야겠어요”라고 충고까지 해준다. 아내와 자식들은 나 때문에 아이들이 버릇없고 산만해진다고 성화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발달단계의 어린이는 신바람이 나야 뇌세포 발달이 활발해져서 적극적이고 활달한 자세를 갖게 된다고 믿는다.

김씨는 손자, 손녀들의 가장 좋은 친구다. 40년간 교직에 몸담은 김씨는 “어른이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먼저 다가가려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교육 철학을 늘 강조한다. 사람들은 흔히 어른과 아이가 서먹한 문제에 대해 ‘대화의 부족’을 원인으로 꼽지만 김씨는 ‘함께 놀아주기 부족’이라고 생각한다.

“그냥 들어주기만 하는 것도 힘든 일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아이의 정서를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함께 놀 때 주고받는 의사소통만큼 솔직한 것은 없죠. ‘어린 시절에 참사랑을 충분히 받으면 유혹에 꺾이지 않는 건강한 사회인으로 자란다’는 교육의 기본원리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김씨는 새삼 강조했다.

◆ “거름이 뿌리를 찾아가면 곡식은 죽는다”

8월 8일(토)
어제 밤엔 녀석들을 이끌고 극기 훈련을 했다. 어두운 시골길에 각자 전봇대 하나쯤 간격을 두고 따라오도록 했다. 두려움으로 이따금씩 큰 소리를 지르긴 했지만 이제 몇 번째 하는 것이라 잘들 참고 견뎠다. 무덤 돌아오기 작전도 성공했고, 돌아오는 길에 별자리 공부도 했다.

오늘은 잡초 밭에서 방아깨비·베짱이·개구리 잡기, 지렁이 잡아 닭 먹이주기, 닭 집으로 몰아넣기, 화분에 꽃 옮겨심기를 했다. 옥수수 껍질 벗기기, 고구마 캐기는 많이 해봤지만 벌레를 만져보게 하기는 처음이었다. 닭을 풀밭에 풀어준 다음 지렁이, 메뚜기도 잡아주고 닭과 함께 뛰어 놀다가 제 집으로 몰아넣었다. 나 혼자 했으면 금방 상황이 종료됐겠지만, 아이들과 함께 작전을 세우고 협력해 임무를 완수했다. 집사람이 고구마, 감자를 삶아서 내오자 녀석들은 “햄버거보다 훨씬 맛있다”면서 입에 잔뜩 묻혀가며 허겁지겁 먹었다. 자신들이 직접 캐낸 것이라 맛이 더 있었을 것이다.

다음 과제는 화분에 꽃 심기. 잔돌을 넣고 모래를 깔고 거름을 적당히 섞어 흙 넣어줘야 한다. 각자 심은 꽃을 보고 “내가 심은 꽃이 더 예쁘다”며 서로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보니 흐뭇하다.

김씨의 집엔 넓은 뜰과 텃밭이 있고, 그 앞에는 맑은 시냇물이 흘러 아이들이 농촌 체험을 하기에 좋다. 손자들에게 일정한 과제를 내주고 자신도 그 일원이 돼 함께 해결해나간다. 그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아이들이 자연의 소중함과 협동의 중요성을 깨우칠 수 있도록 지도해왔다.

그는 “뿌리가 거름을 찾아가야지, 거름이 뿌리를 찾아가면 곡식은 죽는다”는 농사의 격언을 인용하면서 “교육 역시 자녀의 손에 바로 쥐어 주는 것이 아니라 찾아가게 하는 것”이라는 40년 교육 철학을 피력했다. 직접 상경해 손자들에게 “자연과 협동은 중요하다”는 교과서식 훈계를 반복하는 것보다 농촌 체험을 택한 것 역시 이러한 소신에서 비롯된 것이다.

◆ 할아버지 댁 창고는 ‘로봇 공장’

8월 14일(금)
녀석들이 좋아하며 자주 찾아올 수 있도록 작은 모래벌판과 그네, 창고 작업실 등을 갖춰 놓았다. 올해도 아이들이 제일 먼저 찾는 곳은 역시 창고 작업실이다. 오늘도 아이들은 톱으로 나무도 잘라보고, 망치로 못도 박아보고, 깡통으로 로봇 같은 공작물을 마음껏 만들어본다. 조금은 더럽고 어질러져도 좋은 곳, 그래서 더욱 편한 곳이다. 작업장에 들어오면 서로 멋진 작품을 만들어 보려는 창작의욕과 경쟁심 때문에 좌뇌, 우뇌, 오감을 총동원해 집중한다. 그 모습이 어찌나 보기 좋은지 모른다.

서울의 아파트 숲에서 자란 아이들에게 할아버지 댁 창고는 그야말로 ‘없는 게 없는’ 민속 박물관이기도 하다. 헌 재봉틀, 숯다리미, 놋대야, 요강, 인두, 풍로(風爐), 타자기 등 200여 가지의 옛 물건들이 비치돼있다. 김씨는 아이들이 작품을 만들면 꼭 그 안에서 작은 전시회를 열고 부모를 비롯한 온 가족에게 자랑하게 한다. 누가 봐도 변변찮은 작품이지만 아이들은 자신의 작품을 보물처럼 여긴다.

김씨가 아이들의 즐거운 방학을 책임진 지 벌써 10년이 되어가는 사이, 큰 손녀는 어느덧 중학생이 되었다. 이제는 마을 안팎에 널리 소문나 손자, 손녀들이 머무는 방학 때면 동네의 또래 어린이들도 김씨의 집을 불쑥 찾아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젊은 부부들이 맞벌이를 하면서 자녀들과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기 어려운 가정구조가 조성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할아버지, 할머니의 역할이 더욱 무거워졌다고 느낍니다. 세상의 모든 할아버지, 할머니는 손자, 손녀들의 가장 훌륭한 교육자가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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