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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사 아닌 제3자가 이토<伊藤博文> 쐈다고?

쥴라이신부 2009. 11. 1. 10:22

[Why] 안중근의사 아닌 제3자가 이토<伊藤博文> 쐈다고? 일본은 왜…

 

이토 수행한 무로다가 촉발 탄환종류·총탄궤적 억지 주장
"유약한 조선인이 어떻게…" 멸시하는 생각 바탕에 깔려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哈爾濱)역에서 처단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제3의 인물에게 살해됐다는 주장이 일본에서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왜 그들은 100주년을 맞은 안중근(安重根) 의사의 의거(義擧)를 부인할까?

일본의 주장은 인터넷 '위키피디아' 일본어판 '안중근' 항목에도 나와있다. '인신공양설(人身御供說)'이란 소제목 아래 안 의사가 진실을 은폐하기 위해 스스로 몸을 던졌다는 내용을 실었다. 도대체 무슨 뜻일까?

안중근 연구의 권위자 최서면(崔書勉) 국제한국연구원장은 "진원지는 1942년에 나온 책 한 권"이라고 했다. '무로다 요시아야 옹의 이야기(室田義文翁譚)'란 책으로, 조요메이지(常陽明治)기념회 도쿄(東京)지부'가 냈다.


무로다 요시아야(1847~1938)는 하얼빈역 현장에서 이토를 수행한 귀족원 의원이었다. 최 원장은 "이 책은 무로다가 직접 쓴 게 아니라 그의 사후(死後)에 생전의 이야기를 모은 것이어서 공신력이 떨어진다"고 지적했다.

이 책에 등장하는 무로다의 '증언'은 이렇다. 이토가 맞은 탄환은 안 의사의 브라우닝 권총이 아니라 프랑스제 기마총(騎馬銃)에서 발사됐다는 것이다. 기마총은 권총보다는 길고 소총보다는 짧은 카빈총을 말한다.

이 때문에 이토의 몸에 박힌 총탄 세 발이 모두 위에서 아래 방향을 향하고 있다는 것인데, 제1탄의 경우 어깨로 들어와 가슴 젖꼭지 아래에 머물렀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는 안 의사의 위치에서는 불가능하다.

결국 안중근 의사가 아닌 하얼빈역 2층 식당에 있던 정체 모를 '진범'이 비스듬히 내리쐈다는 것이다. 그 식당은 격자 구조로 돼 있어 아래로 쏘기에는 절호의 장소였다는 말까지 하고 있다.

<사진1>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수행했던 귀족원 의원 무로다 요시아야가 그린 '이토 피격 진술도'.
최 원장은 "근거 없는 날조"라고 했다. 무로다는 이토가 몸에 맞은 총탄이 무엇인지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사건 후 러시아는 부검을 건의했다. 일본은 "이토 공(公)의 몸에 어떻게 손을 대느냐"며 열차에 시신을 실은 채 하얼빈을 떠났다.

열차가 다롄(大連)에 도착한 뒤 수행 의사, 다롄병원장, 관동군 군의감이 모여 회의를 했다. 그들은 "탄환을 꺼내자면 수술을 해야 하니 그대로 덮어 두자"고 결정했다. 결국 이토 몸속의 탄환은 누구도 보지 못했다.

그런데 이토 저격 당시 총상을 입은 만철 이사 다나카 세이지로(田中淸次郞)는 자신의 다리에서 꺼낸 총탄을 법정에 제출했다가 돌려받은 뒤 도쿄 헌정기념관에 기증했다. 이 총탄은 권총 탄환이다.

총탄이 이토의 몸을 '위에서 아래로 뚫고 지나갔다'는 것도 사실과 다르다고 최 원장은 말했다. '이토 피격 진술도'라는 총탄 피격도〈사진 1〉는 총탄이 위로부터 아래로 향하는 것 같지만 이는 무로다가 그린 그림이다.

<사진2> 이토의 수행 의사 고야마 젠이 작성한 이토의 사망진단서에 수록된 그림. 총탄이 수평으로 관통하고 있다.
최 원장이 일본 외무성에서 발굴한 '이토공작 만주시찰 일건 별책 제1권 메이지 사십이'라는 문건 중 사망진단서에 수록된 그림〈사진 2〉은 다르다. 이토의 수행 의사 고야마 젠(小山善)이 만든 것으로 무로다의 그림보다 신빙성이 높다.

이 그림은 ▲제1탄은 오른쪽 팔뚝 위쪽을 관통해 오른쪽 갈빗대 부분을 거쳐 심장 아래에 ▲제2탄은 오른쪽 팔꿈치→흉막→왼쪽 늑골 아래에 ▲제3탄은 윗배 중앙 우측→좌측 복근에 박혔음을 명시했다. 세 발 모두 '수평'으로 쏜 것이었다.

최 원장은 "무로다가 주장했다는 내용을 근거로 전후(戰後) 일본에서 '제3자 저격설'이 마치 사실인 것처럼 쓴 엽기적인 소설이 세 권이나 나왔다"고 말했다. 일본인들은 왜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일까?

최 원장은 "이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실제로 이토를 쏜 자는 러시아의 비밀조직원이었다고 본다"며 "'한국인처럼 유약하고 활기 없는 민족이 어떻게 감히 이토 공을 쏠 수 있었겠느냐'는 멸시에서 나온 것"이라고 해석했다.

이토가 죽기 전 "범인은 조선인입니다"라는 말에 "바보 같은 녀석"이라고 말했다는 이야기의 출처도 '무로다 요시아야 옹의 이야기'다. 최 원장은 "이토를 저격한 사람이한인이라는 사실은 이토의 시신을 실은 열차가 출발한 뒤에 밝혀졌기 때문에 이 또한 근거 없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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