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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흥 나로우주센터에서 나로호가 화염을 내뿜으며 발사되는 모습. / 조선일보 DB
한국 '우주개발 파트너' 러시아를 읽는 법
전남 고흥 우주기지에서 발사된 나로호가 궤도 진입에 실패한 직후인 25일 저녁 서울 중구 정동 러시아대사관 그랜드 홀에 각국 대사들이 모였다. 이임하는 글렙 이바셴초프 주한 러시아 대사 환송연이 열린 것이다.
환송연의 화제는 단연 나로호였다. 러시아 대사관 관계자들은 안타까워하면서도 이런 말을 했다. "2억 달러를 더 냈으면 완벽했을 텐데…." 러시아가 맡은 1단 로켓은 괜찮았는데 한국이 만든 것이 잘못된 것 아니냐는 뜻이다.
나로호 문제로 한·러 관계는 당분간 냉랭해질 것이다. 하지만 곰곰 따져보면 당분간 우리의 우주개발 파트너는 러시아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러시아인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우리는 그들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러시아는 2003년 과학기술위성 1호를 대신 발사해 궤도 진입에 성공시켰다. 지난해에는 한국 최초 우주인도 배출했다. 그런데도 우리는 우주개발 프로젝트의 파트너인 그들을 '북극곰'이니 '크렘린'이니 하며 바라본다.
러시아 정서를 정확히 파악하기는 그 어느 나라보다 힘들다. 러시아의 상징 시인(詩人) 표도르 추체프조차 "러시아는 머리로 이해할 수 없으며 자로 잴 수도 없다. 러시아는 그저 느낄 수 있을 뿐이다"고 했을 정도다.
제정 시대, 사회주의 혁명, 공산주의 붕괴를 거치면서 러시아는 슬라브 민족 우월성을 바탕으로 독특한 기질을 형성했다. 1991년 러시아가 제정러시아 시대 상징인 쌍두(雙頭) 독수리 문장을 부활시킨 것도 의미가 크다.
독수리의 머리에는 왕관이 씌어 있고 그 위에 더 큰 왕관이 씌어 있다. 오른쪽 발에는 지팡이 같은 홀(笏)이, 왼쪽 발에는 황금구가 쥐어져 있다. 홀은 황제의 권위를 상징하고 황금구는 러시아 정교를 상징한다.
결국 쌍두 독수리 머리 하나는 유럽을, 다른 하나는 아시아를 상징하는 것이다. 그 왕관 위에 더 큰 왕관을 두는 것은 유럽과 아시아를 지배하겠다는 것이고 러시아 정교를 바탕으로 한 슬라브족의 우월성을 떨치겠다는 것이다.
러시아적 특질 중 가장 대표적인 이중성이 바로 여기서 나온다. 아시아와 유럽에 걸쳐 있는 지리적 조건은 러시아인들에게 서구적인 것과 동양적인 것이 혼재된 가치관을 갖게 했다. 이것이 이중성의 원인이다. 또 다른 이유는 러시아 정교다. 가톨릭과 삼위일체 교리 갈등을 벌이다 갈라져 나온 러시아 정교는 민간신앙에 뿌리를 둔 민중문화가 뒤섞여 이중적이 됐다. 이게 러시아의 정치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요소다.
극단성에 대해 많은 이들은 러시아의 광활한 영토를 들어 설명한다. 철학자 베르자예프는 러시아인의 극단성을 캄캄한 밤, 작은 등불 하나에 의해 끝없는 시베리아의 평원을 질풍처럼 달리는 트로이카(삼두마차)에 비유한다.
이 이중성과 극단성은 국제정치에서 미국을 견제하고 종교적으로는 가톨릭과 대립 각을 세우는 역할을 하고 있다. 러시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대국(大國) 기질, 슬라브족 우월주의, 러시아 정교라는 3가지 측면을 고려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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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러시아 그리고 러시아인 속내는‘마트료슈카’에 곧잘 비유된다. 마트료슈카는 러시아의 전통 목각인형으로 인형 속에 인형이 몇개에서 수십개까지 들어 있다. 러시아를 아는 것은 그 마지막 인형의 실체처럼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인형에 그려진 소련\러시아의 역대 지도자들은 오른쪽 두 번째부터 레닌, 스탈린, 흐루쇼프, 브레즈네프, 안드로포프, 체르넨코, 고르바초프, 옐친, 푸틴. / 최순호 기자 choish@chosun.com
국제정치와 외교에서 이 특성을 모르면 러시아와의 관계를 매끄럽게 할 수 없다. 러시아는 미국보다는 유럽, 유럽 중에서도 강국인 독일과 이탈리아, 프랑스와 전통적으로 연대를 맺거나 외교적인 역량을 강화해 왔다.
하지만 동유럽 등 약소국은 힘으로 압박하는 전략을 구사해왔다. 이는 사회지도층 인사들의 시각에서도 공공연했다. '러시아의 살아 있는 양심'으로 통했던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조차 슬라브 우월주의를 내세워 카자흐스탄 등 옛 소연방 국가들을 자극했다.
러시아의 특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한국은 1990년 외교수립 이후 번번이 러시아에 당했다. 경협차관을 제공하면서도 협상에서 주도권을 잃었다. 러시아제 무기를 들여오면서도 후속지원 문제로 매번 끌려 다녔다.
한국은 러시아를 우습게 보고 덤볐다가 외교적 곤욕을 치른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작년 1월 이재오 한나라당 최고의원을 대표로 한 대통령 특사단은 러시아 방문 중에 당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접촉조차 하지 못했다.
2002년에도 우리 특사단은 푸틴을 만나지 못했다. 중동과 아프리카의 국무 총리나 외무장관도 크렘린궁에서 푸틴 대통령을 만나고 가는 게 관례였는데 우리는 푸틴 취임 후 외무장관은 물론 총리조차 그를 면담하지 못한 것이다.
2000년 이한동 전 총리의 러시아 방문 당시 에피소드는 유명하다. 이 전 총리는 대통령 행정실에서 면담 확답을 주지 않았는데도 혹시 푸틴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궁 주위를 수시간 동안 맴돌기도 했다.
이런 외교적 오점은 이미 사할린 상공에서 소련 전투기에 의해 대한항공기가 피격될 때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우리 외교관이 살해될 때도 연출됐었다. 전문가들은 이런 현실 때문에 나로호 발사 연기와 궤도 진입 실패를 두고도 러시아에 대해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러시아와 결별하면 어떻게 될까. 한 러시아 전문가는 "러시아는 한반도 전문 외교관들을 수십년째 한국통으로 키우지만 우리는 러시아 파견 외교관을 2~3년 정도 근무하고 순환시키고 있다"고 말했다.
러시아에서는 사적인 채널 유지가 중요한데 이런 커넥션이 없으니 러시아 실세들과의 지속적인 접촉 자체가 힘든 것 아니냐는 것이다. 할 말은 많은데 속만 태우는 게 바로 우리의 대(對) 러시아 외교의 현주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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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3년 러시아 우주기지 플레세츠크에서 러시아 코스모스 로켓에 발사돼 궤도 진입에 성공했던 과학위성 1호. 나로호에서 과학위성 2호가 로켓에 실렸지만 당시에는 1호가 성공적으로 궤도에 안착했다. /정병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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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3년 과학위성 1호가 러시아 로켓에 실려 성공적으로 궤도에 진입한 뒤 축하하는 관계자들. 당시 항우연 원장 등 국내참가자들과 러시아 관계자들이 성공발사를 축하하고 있다. 우리의 위성은 러시아가 대신 발사해 왔다. /정병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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