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만 잡을게' '젊은이' '새마을'…
발랄한 문구 티셔츠 인기몰이
'진달래꽃'·'별 헤는 밤' 등 詩句…
고급 패션으로 승화시키기도
'스미스의 미국(Smith's America)' '진짜 시험 (True test)' '나는 스머프(I am Smurf)' '도시 철학자(urban philosopher)' '엉덩이를 가져와(bring the ass)'…. 도심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사람들의 티셔츠에 적힌 의미 없는 영문(英文)들이다. 한글 티셔츠는 없을까? 있다면 어떤 글자가 써 있을까?티셔츠 전문 쇼핑몰 '반8'의 유강렬 대표가 "5분만 창피하면 존재감을 과시할 수 있다"며 티셔츠 한 장을 보여줬다. 가슴에 궁서체로 '오빠'가 쓰여 있다. 등에 '손만 잡을게', 팔에는 '해치지 않아'라고 써 있다. "이런 옷을 어떻게 입느냐"고 묻자 그는 "처음에만 힘들 뿐 어디서든 관심을 끌 수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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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패션 디자이너 이상봉씨는“수십년 이어져 온 영문 디자인과 이제 걸음마 단계인 한글 패션을 비교해 우리 스스로를 폄하할 필요는 없는 것 아니냐”고 했다. / 박국희 기자
'선물용'이라고 쓰인 티셔츠는 실제 선물용으로 많이 팔린다. 커플 티셔츠에는 "니들이 연애는 해봤어?"라고 써 있다. '재미있는 티셔츠'를 모토로 하는 이 업체는 2003년부터 지금까지 400여종 한글 티셔츠를 만들었다. 미국과 유럽으로 수출도 했다.
연 매출 5억원에 겨울에도 하루 40장씩 티셔츠가 팔린다. '외국인'이라고 쓰인 티셔츠를 외국인이 입고 있는 사진이나 '육개장' '새마을' '보행금지' '소유권 이전' 같은 인터넷의 '엽기' 한글 티셔츠 사진도 이 업체를 모방한 '짝퉁' 제품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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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연아 선수가 입었던 한글 티셔츠.
주로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남학생이 중심 고객이다. 직원 강효섭씨는 "클럽에서 특히 잘 먹힌다"며 "튀는 것을 두려워 않고 자신을 대범하게 표현하는 젊은 층에서 인기"라고 했다. 그는 "'젊은이' 티셔츠를 입은 중년의 거래처 사장이 '폭발적 반응'이라며 흐뭇해할 때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한글 티셔츠 업체는 서울 인사동에 몰려 있다. 출판업체 '인사동 문화'에서는 유명 서예가의 글씨체로 티셔츠를 만든다. 원일재 대표는 "전시 작업을 같이 한 작가들의 글씨를 보면서 한글 디자인을 이용한 가공상품도 가능할 것 같았다"며 "한국 서예가가 1000여명쯤 돼 무한에 가깝다"고 했다.
김소월의 '진달래꽃'이나 '산유화' 같은 시를 국당 조성주 같은 유명 서예가의 글씨체로 티셔츠에 옮기는 식이다. 직원 오용구씨는 "붓글씨를 그대로 스캔해 작업하기 때문에 붓 터치의 느낌도 살아있다"고 했다.
'비상을 꿈꾸며' '동행' '대한민국' '그대가 있어 더 좋은 하루' '참 좋은 당신' 등 의미가 있는 말들을 주로 쓴다. 원 대표는 "정자체로 한글을 새겨 넣으면 그야말로 유니폼이 된다"며 "최대한 한글이 아니고 디자인으로 보일 수 있도록 노력한다"고 했다.
2002년부터 한글 티셔츠를 만들어온 '뽐'에서는 글귀를 설명해 놓은 메모를 꼭 첨부한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라는 글씨가 써진 티셔츠에는 영어와 일어로 무궁화와 술래잡기 놀이에 관한 설명을 해 놓았다. 업체 관계자는 "'뭘 봐'라고 써진 티셔츠를 입은 외국인을 보고 당황한 적이 있다"며 "한국 사람에게 뜻을 물어봤을 때 좋은 의미가 나와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평범하지 않으면서 의미있는 문구를 만들어 내는 게 제일 힘들다고 했다. '안녕, 좋은 하루' '꿈' '친구, 친하게 지내는 벗' '아리랑' '개구리도 움츠려야 뛴다' 같은 옷이 반응이 좋다. 저작권과 관련 없는 글들을 선정하는 것도 어려운 작업이다. 저작권료를 지불하면서까지 티셔츠를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캘리그래퍼(손글씨 디자이너) 신화식씨는 인사동 거리에서 직접 티셔츠에 글씨를 써준다. '독하게 살자' '자기야 사랑해'부터 노무현 전 대통령의 유서 내용이나 유명인의 어록을 적어와 옷에 써달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주로 여성 손님들이 많아 감성적인 글씨체를 쓴다.
신씨는 "자신만의 문구를 쓰려는 손님들은 10명 중 1명이고 대부분은 유명 시인들의 시구를 선호한다"고 했다. 이곳에서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를 셔츠에 써간 양선희(55)씨는 "주위에서 다들 어디서 샀느냐고 물어보는 통에 입고 다닐 수가 없을 정도"라고 했다.
'겨울이 슬며시 가을을 비집고 찾아왔습니다. 엊그제 이 선생님의 패션쇼가 있었는데 갑자기 약속이 생기는 바람에 참석지 못했습니다….' 패션 디자이너 이상봉씨가 2006년 프랑스 파리에서 처음으로 한글 패션을 선보일 때 사용한 글귀다.
친분 있는 소리꾼 장사익씨가 그에게 보낸 개인적인 편지였다. 이씨는 "어느 날 우연히 본 장씨 편지의 서체가 아름답게 느껴져 그것을 그대로 드레스에 접목시켰다"고 했다. 지난 4월 '페스타 온 아이스 2009' 무대에서 김연아 선수가 입은 한글 티셔츠에는 캘리그래퍼 김지수씨가 쓴 정지용 시인의 '향수'가 사용됐다.
이씨는 "김연아 티셔츠를 찾는 전화가 너무 많아 처음으로 한정 수량을 제작해 일선 매장에 내놓았을 정도"라고 했다. 지난해 할리우드 배우 린제이 로한이 화보 촬영할 때 입었던 티셔츠에는 장사익씨가 쓴 윤동주의 '별 헤는 밤'이 써 있었다.
아무 의미 없는 낙서 글을 이용하고 글자를 무작위로 배치하기도 한다. 이명박, 박지성, 황진이, 전봉준 등 1000여명의 한글 이름들을 이어 붙여 만든 디자인도 있다. 이씨는 "원단에 이름을 써놓고 부분적으로 잘라 사용하기 때문에 완성된 옷에 어떤 이름들이 들어가 있는지는 나도 모른다"고 했다.
그는 현재 옷 이외에도 휴대전화, 담뱃갑, 벽지에서부터 국제자동차경주대회인 A1 그랑프리 경주용 차량에까지 한글 디자인의 범위를 넓히고 있다. 이씨는 자기 쇼가 끝난 후 해외 모델들에게 한글 티셔츠를 나눠준다. 그는 "전 세계에서 몰려든 톱 모델들을 통해 입 소문을 내는 것처럼 효과적인 방법도 없을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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